- 아르헨티나
귀국일이 뽀닥 뽀닥 다가온다. 아침 일찍 호스텔 조식을 든든하게 먹었다. 토스트 두 조각에 롤 케이크 한 조각, 사과 1개, 바나나 조금, 그리고 한 사발의 카페라테. 라운지에서 엘 찰튼 행 버스 픽업을 기다린다. 한참을 기다려 마침내 도착한 미니밴 기사는 승객이 나 혼자라고 한다.
3시간이나 걸리는 곳에 나 한 명을 싣고 운전할 기사에게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무척 친절했고, 중간에 풍경이 아름다운 곳을 지날 때는 잠시 내려서 사진을 찍겠느냐고도 했다. 그는 내 사진을 찍어주며 말했다.
“애니, 진짜 예뻐요”
내가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었을 때, 충분히 그가 그렇게 느꼈으리라고 짐작한다. 그렇게 활짝 웃는데 예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어쨌든 절반 정도의 거리에 갔을 때 휴게소 겸 해서 쉬게 된, 호텔 카페에서 난 커피 2 잔을 시켰다. 2 잔에 240페소라니, 엘 찰튼의 물가는 듣던 대로 비쌌다. 한 잔은 버스 기사인 페르난도에게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미안해서 100페소 정도의 팁을 줄까 했었는데 잘 됐다. 그는 몹시 고마워했다.
페르난도가 나를 호스텔 코앞에 딱 내려준 시간은 오전 11시였다. 호스텔 1층은 일반 식당이라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계산대가 호스텔의 리셉션을 겸하고 있었다. 몹시 바빠 보이는 리셉션 청년이 체크인은 1시라며, 짐을 맡기고 2시간 후에 오란다.
뭐 마을 구경도 하고 돌아다니면 되긴 하지만 문제는 날이 춥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유자적 돌아다니기가 쉽지 않았다. 자꾸 시계를 보며 시간을 재게 되고, 어쩐지 체크인해서 옷도 갈아입고 리셉션에 여행 정보도 물어보고, 그런 후에야 길을 나서도 나서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람도 별로 없이 휑한 거리를 훑어보다가, 길 저편에 흐르는 강 쪽으로 가보기도 했지만 차가운 날씨만큼이나 썰렁하고 낯설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그렇게 마을을 돌아다니며 내일 먹을 빵도 사고, 슈퍼에 들러 고기와 와인, 미니 초콜릿, 바나나 등을 사서 호스텔의 소지품 보관소에 갖다 두었다. 아직도 1시간이나 남아서 다시 밖으로 나온다.
걷다 보니 앞에서 한국인처럼 보이는 여자 한 명이 인사를 한다. 그녀는 나를 페루의 파론 호수에서 본 것 같다고 했다. 다른 일행 한 명과 호스텔을 찾는 중인데, 가보니 아니라고 하더란다. 나도 마침 데이터가 다 떨어져서 어떻게 해줄 수가 없었다. 우리 호스텔에 데려가 리셉션에 물어봐주기라도 할 걸, 뒤늦은 후회를 했다. 난 꼭 이렇게 뒷북이다.
호스텔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혼자서 미니 트래킹을 시도해보기로 한다. 못할 건 또 뭔가. 운동화에 패딩도 따뜻하게 껴입었고 카메라도 갖고 나왔겠다. 우선 배가 고프니까 속을 좀 채우기 위해 판데리아(베이커리)에 들어가 엠빠나다 까르네(고기 파이)를 시켰다. 따뜻하게 해달라고 해서 맛있게 먹고 길을 나섰다.
피츠로이 가는 길이라는 푯말을 보고 가는데 앞에서 걸어오던 긴 머리 한국인 걸이 인사한다. 구면인지 초면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외모가 한국인 같아서 인사했겠지 하며 나도 말을 건다. 어제 새벽 1시 반에 도착했단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피츠로이 등반에 나서서 지금, 낮 12시 반에 여기까지 내려오는 길이라고 한다. 트래킹은 그냥 평지 같아서 별로 힘들지 않다고 했다.
그렇게 그녀를 보내고 나니 저쪽에 지친 표정을 한 또 한 명의 한국인 걸이 걸어온다. 내가 미소를 보내며 어떠냐고 물었더니 엄청 힘들다고 했다. 그래, 아무리 평지 같다 해도 왕복 10시간 넘는 산행은 힘들지.
난 그쪽이 피츠로이 가는 길이 정말 맞는지 확신도 없이, 몇 번의 갈림길에서 쉬운 쪽을 택해 걸었다. 평지 같은 산길은 참 예뻤다. 몇 걸음 뗄 때마다 더 예쁜 풍경이 나와 자주 카메라를 들게 했다. 그래, 이 길이 피츠로이 가는 길이면 어떻고 아니면 또 어떤가. 그냥 남은 시간에 난 이 예쁜 길을, 20년 전 스위스의 어느 산을 내려올 때처럼 한가로이 즐기면 되는 것이니까.
정확히 누가 내게 권했을까? 엘 칼라파테는 하루면 되고 엘 찰튼에 3~5일을 강력 추천한다고. 그 말이 맞다. 엘 찰튼은 며칠 머물면서 어느 쪽 방향을 잡아서 걸어보아도, 한가로이 예쁜 자연을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내겐 이틀밖에 없지만.
그렇게 길을 가다 이정표를 보니 500미터 앞에 뭐가 있단다. 이정표의 스페인어 단어들을 이리저리 조합해 봐도, 도저히 뭐가 있다는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화장실이 있다는 건가? 200미터쯤 가니 화장실이 나오긴 했다. 그래, 이정표가 말하는 그곳까지만 가보자 했더니, 어느 지점부터 물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폭포인가?
폭포였다. 그런데 그다음은 뭐지? 어디로도 이어지는 길은 없었다. 그래서 멈춰 선 사람들 중 한 명에게 물었다. “근데 이다음은 뭐가 있지. 이게 끝이야?” 그들도 확신은 없었지만 그런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정표가 나타내고 있었던 것은 이 폭포였던 것이다.
그래도 뭐, 좋았다. 오히려 피츠로이 가는 길이 아니어서 좋았다. 내일 또 같은 길을 한 시간 넘게 가려면 그것도 지루할 일이다. 이렇게 왕복 6킬로의 탐험을 마치고 나니 다리도 아프고 힘들다. 좀 전에 힘든 표정으로 내려가던 한국인 걸이 이해된다.
오늘 와인은 왠지 좀 더 신 맛이 난다. 엘 칼라파테에서의 스테이크와 와인이 정말 맛있었는데. 이미 와인은 삼분의 이 가까이 마셨다. 내일을 위해 이 정도는 남겨야지 싶다. 이곳 아르헨티나에서 거의 매일 3~4천 원짜리 와인을 마시고, 스테이크를 먹으며 지낸다. 잠시 동안이니 그래도 된다. 한국으로 돌아 가면 이 와인과 스테이크가 분명 그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