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츠로이! 아름답고 또 아름다운

- 아르헨티나

by Annie



룸메이트 루이스와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 움직였다. 우리는 서로 오늘 피츠로이 등반을 할 거라는 얘기를 주고받긴 했지만 함께 가자고 한 적은 없었다. 거의 준비를 마치고 내가 그녀에게 선크림이 필요하냐고 물으니 그녀는 괜찮다고 한다.


내가 거울을 보며 립글로스를 바르는 사이 그녀는 나갔고, 호스텔 밖으로 나간 나는 저 앞에 그녀가 걸어가는 것을 보고 뛰어갔다. 그렇게 우리는 피츠로이 등반의 암묵적인 동행이 되었다.

시작 이후 9km는 그냥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길이었는데,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산 위로 올라가게 하는 건지 의문이었다.


아침 숲은 고요했고 우린 말수가 적었다. 등반 객도 거의 없어서 그냥 우리 둘만의 등반이었다고, 아니 산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네에 이런 산이 하나 있으면 날마다 올라갈 텐데. 급경사 하나 없이 평지 같은 길에, 양쪽으로는 아름다운 숲이 펼쳐지고 있어서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루이스는 톰보이 스타일의 짧은 금발 머리에 스포츠를 즐기는 걸이다. 우린 여러 얘기를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든든한 동반자로서 함께 했다. 앞장서서 직진하는 그녀가 없었다면 난 여기저기 작은 풀이나 쓰러진 나무들, 앙증맞은 개울들, 깨끗한 물과 바닥에 깔린 채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조약돌 등에 마음이 팔려 한두 시간은 족히 지체했을 것이고, 그러다가 마지막 힘든 코스인 한 시간 정도의 등반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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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도중에 두어 번 쉬며 힘을 충전해서 다시 걷곤 했다. 마지막 난코스 1km를 시작하기 전에, 우린 껴입었던 재킷을 벗었고 그녀는 민소매 차림이 되었다. 처음 한 겹만 벗었던 나도 이내 더워져서 두 겹을 다 벗고 민소매 차림이 되었다. 지금까지의 쉬운 길과는 딴판이었다. 급경사의 돌길을 낑낑거리며, 부디 저기 눈앞이 그냥 정상이기를 바라며 걸었다.


드디어 정상에 오르니 와! 피츠로이! 아래서 볼 때도 아름다웠지만 정상에서 보는 피츠로이는 정말 아름다웠다. 하늘은 저렇게 파랄 수 있을까 싶도록 파랬다. 그와 대비되는 푸르게 보일만큼 흰 구름들, 대리석으로 빚어놓은 것 같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피츠로이 봉우리들, 그 아래 고여 있는 푸른 호수.


루이스와 나는 고생한 보람이 있다는데 서로 벅차게 동의했다. 우린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었고, 난 한껏 폼을 잡은 근사한 사진을 건지게 되었다. 기막히게 아름다운 피츠로이 봉과 호수를 배경으로.

일부 사람들은 아래 호수까지 내려갔지만 우린 올라올 일을 생각하니 내려가고 싶지 않았다는 것에, 내려가지 않겠다는 것에 뜻을 같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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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다시 급경사의 난코스를 내려오며 올라갈 때까지 괜찮았던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정말 조심해서 내려갔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조심하느라 다리를 옆으로 틀고 내려갔던 것이 오히려 큰 실책이었던 것 같다. 난코스 지역을 다 내려와 평지를 걸으면서도 내내 다리와 무릎이 아프다.


난 루이스에게 개울가에서 잠시 쉬자고 했다. 그곳에 앉아 간식도 먹고, 올라갈 때는 그냥 스치기만 했던 개울도 보고 싶었다. 스위스 마터호른에서 혼자 걸어 내려오던 때가 생각났다. 그와 비슷하게 아름다운 풍경. 자리 깔고 앉아 한 나절 정도 피크닉 하기에 딱 맞을 풍경과 날씨. 약간의 바람이 있긴 해도 춥지 않고, 햇빛도 강하지 않으면서 따뜻했고, 풍경은 너무 예쁘고 공기도 너무 맑았다.


다시 일어나 걷는데 발을 떼기가 힘들다. 루이스는 저만치 앞에 걸어가고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직진 루이스는 뒤도 안 돌아보고 걷는다. 우린 아직 서로 이름을 모르는 사이였으므로 이름을 부르지도 못하고, 나는 그녀를 향해 소리친다.

“네 페이스대로 계속 가. 나는 더 천천히 갈게. 주변 풍경도 즐기면서.”

그녀는 쿨하게 그러라며 멀어져 갔다. 겨우 한 시 반이니, 시간도 넉넉했다.


내 다리의 통증이 그녀의 보폭에 맞추기 어려운 것도 있었지만 그거야 차츰 괜찮아지겠지 했다. 정말 바랐던 것은 올 때 직진만 하느라 그냥 지나쳐 왔던, 예쁘고 아기자기한 풍경을 천천히 음미하며 즐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리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걷기는 더 힘들어졌다. 거의 다리를 끌다시피 했다. 무릎을 접으며 걸을 수가 없어서, 장작처럼 편 채로 걸어야 했다.


풍경도 아침과는 느낌이 달랐다. 아침의 그 고요함과 수목 색깔의 선명함이 좋았는데, 한낮의 직사광에 드러난 숲은 디테일이 사라져 있었다. 게다가 난 정말 들것에 이송되어야 마땅할 상태가 되었다. 나중엔 다리를 적게 쓰려고 배와 엉덩이에 바짝 힘을 주고 걸었다. 그러니까 조금 나은 듯도 했지만 통증은 여전히 심했고, 내 걸음은 더욱 느려졌다. 난 오가는 많은 등반 객들에게 좁은 길을 비켜주기 위해 수없이 멈춰 서야 했다.


두 갈래 길 중 선택해야 하는 곳에 이르렀는데, 나는 아침에 거리를 두고 지나쳐왔던 호수가 있는 길을 다시 택했다. 직진 산행을 위해 위쪽에서 그냥 스쳐갔던 터라 그 호수를 천천히 보고 싶었다. 내려가 보니 호수는 너무 아름다웠다. 물이 유리처럼 맑아서 물아래 깔린 모래 알갱이들이 더할 수 없이 선명하게 보였고, 물빛도 하늘빛도 산 빛도 눈이 시릴 듯이 맑았다.


난 양말을 벗고 물속에 발을 담갔다. 기분이 한결 나았다. 그 호수를 배경으로 그 너머에, 흰빛의 피츠로이 봉우리들이 보였다. 산봉우리라기보다 마치 아름다운 성처럼 보인다. 호수에 선 위치에 따라 풍경은 모두 달랐다. 이쪽 길로 다시 오기를 얼마나 잘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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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통스러운 하산 길은, 난코스를 제외하고도 4시간 넘게 걸렸다. 그렇게 느린 걸음으로, 그래도 그 시간에 마을까지 내려왔다는 것조차 신기할 지경이었다. 멀고 먼 길이었다.

피츠로이를 보고 내려오며, 내 다리가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이곳에 와서 이 피츠로이를 본 건 너무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이 씨가 됐나 보다. 근육이 파열된 게 아닐까? 이대로 다리에 문제가 생긴 채, 제대로 된 치료도 못 받고 영 다리를 상하게 되면 어떡하나 걱정되었다.


그렇게 다리를 질질 끌며 호스텔로 돌아왔더니, 루이스는 그때까지도 룸에 그냥 앉아 있었다. 내려가면 근사한 식사를 하자고 했었는데, 그녀는 여태 점심도 안 먹은 채 그냥 그러고 있었다. 난 죽는소리를 하며 힘들어했고, 일단 샤워를 해보기로 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나오니 기분은 좋으나 통증은 여전했다.


우린 식사를 하러 호스텔을 나섰다. 스테이크 요리를 해 먹으려 했던 원래의 생각은 이미 없어졌고, 나는 내 몸에 근사한 음식으로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호스텔 근처의 괜찮아 보이는 식당으로 갔다. 난 다리도 아팠고 감은 머리도 마르지 않았고 바깥바람은 차가웠다. 그래서 멀리 갈 생각도 없었지만, 그 식당은 아늑했고 햇빛을 등지고 앉은자리는 따뜻하게 내 머리를 말려 주었다.


루이스는 햄거버를 시켰고 난 트로피컬 피자를 시켰다. 여기 피자는 파인애플을 조각내지 않고 동그랗고 큼직하게 썰어 얹어서, 보기에도 좋았고 맛도 일품이었다. 그러나 엘 찰튼에 대한 소문대로 값은 비쌌다. 해피 아워라 맥주 한 잔을 시키면 두 잔이 나왔지만, 총 710페소(우리 돈으로는 여전히 14,000원이라는 괜찮은 가격이긴 했지만)가 나왔다. 흡족하다. 난 그 큰 피자 한 판을 다 먹었다. 루이스는 많이 먹는 체질은 아닌 모양이다. 자기 햄버거도 많다고 내 피자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하긴 서양인들에게는 피자 위에 파인애플 얹은 것이 좀 끔찍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500cc 맥주 두 잔까지 다 마신 나는 포만감에, 깨끗하게 씻어 말린 몸에, 적당한 취기에 기분이 좋았다. 루이스와 나는 뒤늦은 통성명을 하고 많은 얘기를 나눴다. 루이스는 엄마와 매일 문자하고, 통화하고 여행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한다. 난 딸들과 그러지 않는데. 딸들은 내게 그만큼의 관심은 없는 것 같은데.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니 이 또한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다.


룸에 돌아와서, 루이스는 피곤하니 일찍 자야겠다고 했다. 난 늦게까지 와인도 마시고 잘 거라고 했지만, 잠시 침대에서 쉰다는 것이 금방 시간이 흘러버렸다. 내 스테이크용 고기는 냉장고에서, 그리고 내 남은 와인은 룸에서 그렇게 방치되다, 아침에 다른 여행자들을 위한 남은 음식 칸에 놓이게 되었다.


루이스는 3주 남은 여행 일정과 귀국 티켓을 취소하고 내일 귀국하는 비행기 표를 새로 샀다고 했다. 이곳 남미에도 코로나가 심각해져서 각 나라들이 국경을 폐쇄한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는 것이다. 이미 파리 경유의 귀국 비행기가 파리의 급박한 코로나 상황으로 지연되면서, 취소하고 새 비행기 표를 끊어놓은 참이지만, 내가 경유하게 될 미국도, 남미에서 오는 항공편을 차단한다는 말이 있었다.

루이스가 탈 비행기는 스페인을 경유한다고 하는데, 스페인도 지금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해서 안전지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옵션이 없다고 했다. 어쨌든 그것도 내일이 되어봐야 알 수 있는, 그날그날 급격하게 변화하는 상황이었다.


나도 아침에 불안해져서 내일이라도 출발할 비행기 편을 알아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남미와 유럽이 장기적 코로나 상황으로 가게 된다면, 여기에 더 남아 있다가 오도 가도 못 할 수 있다. 남아서 정상적인 여행을 할 수만 있다면 문제 되지 않겠지만, 이곳에서의 일상도 호스텔에 갇혀 있게 될 수도 있다.

호스텔조차 여행자들을 안 받고 문을 닫는 상황이 될 수도 있고, 생필품을 구입하는 것조차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실제로 일부 호스텔에서는 동양인 여행자들을 안 받는 일도 있다고 한다.


정우는 공항이 더 위험하다고, 세계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고, 이번 기회에 아주 싼 여행을 더 하라고 했지만, 그것은 이곳 상황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삼사일 더 있는 것이 이제는 별 의미도 없다. 가려고 했던 미술관도 문을 닫았고 공원도 폐쇄되었는데,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인가? 일단 데이터 충전을 해서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는 항공편을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람들의 공포 심리란 일단 발동되면 제어가 어려워진다. 가능한 한 빨리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한번 하게 되자, 자꾸 그쪽으로 생각이 몰리며 마음이 다급해진다.


한국에 돌아가면 먹고 싶은 것들의 리스트를 생각해봤다. 내가 만든 김밥과 파스타, 라면, 연어와 아보카도가 들어간 냉 우동, 돌솥 비빔밥, 김치, 또 뭐가 있지? 달콤한 소스가 들어간 야채 비빔밥, 그리고 소금과 올리브유를 이용해 구운 스테이크... 한국에서도 말벡 와인을 팔까?

여기 있는 동안 와인을 몇 병 더 마실 수 있을까? 석 달 동안 여행하며 노트 두 권을 다 못 채웠네. 여분의 수첩 두 개를 다 채우긴 했지만. 많은 일들이 있었을 텐데, 나는 어느 만큼을 기억하고 있을까?


내일을 알 수 없는 이 코로나 상황에서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곳 아르헨티나에는 멘도사에 알바로가 있다는 것, 그리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알렉산더와 호그스 호스텔 주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유사시 나의 최후 보루이다.

현금이야 한국에서 조달할 수 있다. 그래, 조금 느긋해지자. 한 달 더 있으면 어떨까? 5월쯤 되면 유럽이든 어디든 다 봄이니까, 정우 말대로 코로나 바이러스는 자연사하게 될지 어떻게 알아? 즐길 수 있을 때 최대한 즐기자. 맛있는 것도 마음껏 먹고.


마음이 장벽을 만들고, 공포를 만들고, 불안과 짜증과 분노 등등을 만드는 공장이다. 그걸 만드는 곳은 폐쇄시켜버리고, 상황이 나빠져도 끝까지 살아남는 인간의 온정, 사랑 등을 기대해 봄이 더 낫지 않겠는가.


글을 쓰다 보면 전혀 예기치 않았던 생각들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번에 내 귀국행 비행기가 경유하게 될 칠레와 미국의 항공편이 묶이면, 그냥 아르헨티나에서 한 달 더 살자. 정말 따뜻한 봄이 되어 한국도 정리되고, 아름다운 오월, 아파트 담장에 장미가 피어날 때, 그때 돌아가면 되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여행을 하다 보면 단순해지기도 한다. 맛있는 것, 향기로운 커피, 아름다운 곳을 좋아하고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이 크고, 숙소에 돌아오면 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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