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헨티나, 페루, 미국, 한국
엘 갈라파테에서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도착하는 비행 편은 국내선이 아닌 국제선 공항에 내리기 때문에 시내까지 가려면 아주 먼 거리다. 밤 9시가 다 되어 공항에 도착했지만 택시 대신 버스를 타기로 했다. 짐이 가벼울 때는 그것이 가능하다.
종점에서 종점까지 가는 것이고, 거기에서 또 택시를 타기는 해야 했다. 종점까지 가는데 한 시간 반이 걸렸다. 택시 타고 호스텔에 도착하니 거의 11시가 다 되었다. 바로 옆 슈퍼에서 바나나와 감귤, 와인 한 병, 치즈, 그리고 너무 목이 말랐으므로 맥주도 한 병 샀다. 벌컥벌컥 들이켜고 싶었다.
호스텔 주인아저씨가 반갑게 맞아주었고, 나는 집에 도착한 것 같은 안도감에 상당히 흥분되어 있었다. 방에 올라가지도 않은 채 그냥 로비 식당에 앉아 와인을 트고 맥주를 땄다. 그곳에 앉아있는 이들에게 함께 마시자고 한 옥타브 높은 음성으로 말했으나, 다른 사람들은 그다지 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난 오늘 흠뻑 마시고 취하고 싶었다.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다.
작은 맥주 한 병을 비우고 치즈 반쪽과 바나나 한 개를 안주 삼아 와인을 거의 삼분의 이 정도 마셨다. 12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라 방에서 소리 내지 않으려고, 부러 공동욕실에 먼저 들러 세수하고 준비해둔 잠옷까지 다 갈아입고 들어가려 했다.
그런데 안에서 문이 잠겨있다. 아무리 열쇠로 열어보려 해도 열리지 않았다. 오늘이 근무 첫 날인 리셉션 아가씨에게 말했더니, 그녀도 열지 못한다. 그녀가 여분의 다른 열쇠 뭉치를 가져왔지만 역시 열지 못했다. “노크를 해볼까?” 내가 그녀에게 묻고는 노크를 했더니 한 할머니가 눈을 비비며 나온다. 미안하다고 머리를 조아리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문제는 새벽 5시쯤 화장실에 가려고 하는데 또 문이 잠겨있다. 더듬더듬 열쇠를 찾아 문을 여는데 열리지 않는다. 방 열쇠일 것으로 보이는 큰 열쇠가 안 되자, 작은 열쇠를 사용해 보았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작은 열쇠는 락커 열쇠였다. 열쇠 구멍이 작아 보여 작은 열쇠를 이리저리 돌려보는데, 그만 열쇠가 구멍에 끼어서 나오지 않는다.
화장실은 가야겠고. '아니, 호스텔 방문을 왜 잠그는 거지?' 외출한 것도 아니고 싱글 룸도 아닌데. 방법이 없었다. 다시 그 할머니를 깨웠다. 그녀는 안대까지 하고 자는 중이었다. 할머니가 일어나고 열쇠를 돌려보더니 안 된다고 했다.
“네가 문을 고장 낸 거야. 너 술 마셨지? 술 냄새가 나더라고. 이제 너 일 났다.”
어이가 없었다. 그러게 호스텔 방문을 안에서 왜 잠그며, 내가 술 취한 것과 그것이 무슨 상관이냐고. 취해서 그런 게 아니라 열쇠가 원래 안 맞았던 것인데. 이런 유의 여자들이 정말 싫다. 사람을 멋대로 판단하고 멋대로 얘기한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는 것도 없고. 나로서는 무척이나 미안한 상황인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면박을 주다니.
결국 다시 리셉션에 전화를 걸어 직원이 올라왔지만 될 리가 만무였다. 결국 우리는 방에 갇혀 버린 셈이다. 밖에서 문을 열어보려고 계속 시도했지만 열지 못하고, 결국 옆방과 통하는 문을 끌러서 그 방을 통해 출입을 하게 되었다.
새벽에 웬 난리람. 기분 좋게 취했었는데, 결과는 술주정뱅이가 되어 호스텔 열쇠 구멍을 망가뜨리고,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면박까지 당하게 되다니. 그러나 화장실에 다녀와서는 또 곧장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8시 반인데 룸메이트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체크아웃하고 짐 맡기고 나가서 돌아다니다 오후에나 팔레르모로 넘어가야지.
그런데 뉴스를 검색해보니 남미의 코로나 사태가 급박해지고 있었다. 4일 후에 떠날 예정이었지만, 그때 가면 상황이 또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 영 막혀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급히 비행기 표를 검색했다. 오늘 저녁에 떠나는 비행기가 있었다. 가격은 150만 원이었다.
내가 사둔 표보다 70만 원이나 더 비싸다. 하루 더 늦게 출발하면 50만 원 더 싼 표가 있다는 알림이 떴지만,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라 난 그냥 오늘 떠나기로 했다.
페루의 리마와 LA를 경유한다. 미국이 남미에서 오는 항공편을 오늘, 내일 중에 막는다는 뉴스를 본 터라, LA 경유가 마음에 걸리기는 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멕시코를 10시간인가 경유하는 비행기는 175만 원이었다. 그걸 끊었어야 하나 잠시 후회도 되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호스텔 주인에게 내가 문고리를 고장 냈다고, 수리공을 부르라고, 내가 돈을 내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내 어깨를 토닥이며 괜찮다고 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둘이 올라가서 해보더니 안 되는 모양이다. 내가 다시 수리공을 부르라고 하자, 역시 괜찮다며 자기가 내일 다시 손보겠다고 했다. 참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리 쉽게 될 일은 아닌 듯싶었다. 봄이랑 여름이가 유럽 여행할 때, 봄이가 호스텔 대문 열쇠를 부러뜨린 바람에 호스텔 전체 열쇠를 바꿔야 해서, 50만 원을 물어준 적이 있다. 내가 그 짝이 아닐까 생각했다.
짐을 맡기고 나가 식당에서 마지막으로 스테이크를 먹고 있는데 누가 창문을 두드린다. 엘 갈라파테 숙소에서 마주쳤던 한국인 여행자다. 산텔모 시장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우리는 반갑게 마주 앉아 얘기하다 헤어졌다. 점심 후 산텔모 시장을 한 번 둘러보고 카페에 가서 좀 앉아 있다 보니 얼추 공항에 갈 시간이 되었다.
우버를 부르고 호스텔 짐 보관소에서 짐을 꺼내려하는데, 리셉션 걸이 보스가 메모를 남겼다고, 방문 수리비가 천 페소 나온다고 했다고 한다. 생각보다 많이 나오긴 했지만 2만 원을 50만 원에 비하겠는가. 난 흔쾌히 천 페소짜리 지폐를 건네주고 나왔다.
택시를 기다리고 있으니, 두세 번 호스텔 로비에서 마주칠 때 짧은 얘기를 나누었던 남미 청년이 떠나는 거냐며 택시가 오는 것을 함께 기다려주었다. 그는 내 캐리어를 택시에 넣어주고 남미 식으로 포옹 인사를 했다. 사람 간에는 이런 따뜻함이 필요하다.
국제선 공항에서 산텔모까지 올 때, 버스로는 한 시간 반이 걸렸지만 택시로는 35분 정도 걸린다. 시내를 벗어나 공항로를 달릴 때, 기사가 차를 너무 빨리 모는 바람에 뒷좌석에 앉은 나는 안전벨트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 고민에 빠졌다. 사실 그럴 땐 기사 눈치를 볼 게 아니라 무조건 안전벨트를 해야 한다. 목숨이 걸린 일 아닌가. 그러나 난 그러지 못했다.
남미 여행을 하면서 정말 목숨을 걸고 여행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낭떠러지 산길을 구불구불 돌아 밤새워 달리는 버스를 몇 번이나 탔던가. 또 제대로 정비되지도 않은 낡은 택시들이 무법천지로 달리는 길, 차도 아닌 뚝뚝이가 커브 길을 전속력으로 달리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땐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 된다. 이러다 죽어도 어쩔 수 없는 거지 하는.
공항에 세 시간 전에 도착했지만 체크인과 출국 심사 줄이 길어서, 비행기 출발 15분을 남겨두고도 나는 긴 줄 한가운데 서있어야 했다. 다급해진 나는 직원을 불러 사정 얘기를 했고, 내 뒤에 있던 사람이 내게 영어로 번역해주었다.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비행기 출발 시간이 되었는데도 내가 안 나타나면 항공사 직원들이 나를 부르러 올 거라고, 그때까지 비행기는 안 떠날 거라고 했다. 하지만 앞쪽 줄에 서있는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먼저 해볼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통역해준 그이가 우리 건너편 맨 앞줄에 서있는 두 여자에게 양보해줄 수 있느냐고 물으니, 두 여자는 생뚱맞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그러자 그는 그 뒤에 서있는 남자에게 또 물어본다. 그는 선뜻 자기 앞자리를 내주었다. 나는 두 남자에게 번갈아 감사의 말을 전하고 수속을 마친 후 게이트로 뛰어갔다.
그러나 정작 게이트 앞에서는 아직 탑승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런!’ 차분히 앉아서 전화기 충전을 했다. 출발 시간이 되었는데도 움직임이 없어서 승무원에게 물었더니, 진정하고 기다리란다. 자기들이 그 비행 편의 승무원이라고, 자기네가 움직이면 그때 따라 움직이면 된다고, 아직은 아니라고.
결국 비행기는 한 시간 늦게 출발했다. 그렇지만 페루에서의 체류 시간은 2시간이고, 비행기가 한 시간 연착하면 1시간밖에 시간이 없다. 거기서도 입출국 수속을 또 해야 하는 건지, 그러다 비행기를 놓치는 건 아닌지 안달이 났다.
페루를 출발해 LA로 가는 비행기를 놓치면, 한국에 돌아갈 길이 묘연해지는 건데. 속으로 조바심을 내던 나는 비행기 안에서 화장실에 가는 길에 승무원에게 물어봤다. 시간이 빠듯하긴 하다. 라땀 연결 항공편인 것 같은데, 그 비행기도 지연될 거다. 뭐 그런 류의 대답이었다. 아니면 한두 시간 뒤에 LA행 비행기가 있으니, 그걸 타도 된다고 했다.
페루에 도착해서 의료 복에 마스크를 장착한 사람들이 비행기에서 내린 승객들의 열을 재고 있었다. 화물을 찾고 입국 수속하는 길은 빼곡히 여러 줄로 사람들이 기다리고 서있었다. 다행히 비행기 환승이라는 표지판은 그 줄 옆의 빈 길로 통하게 되어있었다. 줄도 길지 않고 따로 출입국 수속을 하지도 않아도 되어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데 문제가 없었다.
드디어 LA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렇게 출발한 비행기를 LA 공항에서 돌려보내지는 않겠지. 그렇다면 귀국에는 차질이 없겠지. 비로소 마음이 놓였고 LA공항에 도착하니 ESTA(전자비자)를 가진 사람은 시민권이 없어도, 온라인 입국 수속이 가능해서 줄 설 필요도 없이 신속했다. 난 오히려 미국이 출입국 절차가 엄청 복잡할 줄 알았는데 너무 쉬웠다.
화장실에서 드디어 이도 닦고 세수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그런데 칫솔을, 캐리어의 목욕 가방에 넣어버렸는지 안 보인다. 덕분에 미국 칫솔을 하나 샀다. 한국행 아시아나 게이트 앞에는 여기가 한국인가 싶게 한국인들 일색이었다. 안내 방송도 모두 한국어, 마음이 편안해진다.
자리도 통로 석인 데다, 내 옆자리는 비어있기까지 했다. 기내식으로 비빔밥이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인천 공항에 도착하면 비빔밥을 한 그릇 먹고 갈까 했는데. ‘아, 맛있다!’ 한동안 계속 라땀 항공만 타다가 오랜만에 아시아나를 타니 너무 좋다. 일회용 칫솔과 치약까지 나눠준다. 그렇지. 비빔밥 먹고 양치 안 하면 좀 힘들지. 게다가 일회용 슬리퍼까지 나눠준다.
출발한 지 두세 시간 지나니 불이 희미해져서 글을 쓰기도 힘들었지만, 난 그냥 어두운 가운데서도 쓰던 것을 마저 썼다.
그 후로는 잠이 오지는 않아서 영화를 두 편 보았는데 조금 출출해졌다. 마침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온다. 안 자고 깨어있는 이들에게 달걀과 치즈가 들어간 잉글리시 머핀과 음료가 서빙된다. ‘좋아, 좋아’
화장실도 많아서 줄 설 필요 없을 만큼 넉넉했다. 보던 영화를 마저 보고 조금 자볼까 했는데 다리가 부어서 힘들고, 자는 게 오히려 더 힘들다. 그냥 깨어서 다시 영화를 한편 본다. 그러고 있으니 또 식사가 나온다. 이번엔 새우 파스타, 세비체 같은 샐러드, 과일, 빵과 버터, 커피. ‘아! 아시아나 기내식 너무 맛있어!’
13시간(LA-인천) 비행은 이렇게 크게 지루하지 않게, 힘들지 않게 끝나간다. 이로써 3개월간의 중남미 여행이 모두 끝났다.
지금 당장은 집에 돌아가는 게 너무 좋다. 마음이 놓인다. 집에 돌아가 내 욕실에서 씻고 내 침대에 눕고 싶다. 봄이더러 그냥 터미널로 데리러 오라 해야겠다.
귀국한 다음날, 내가 경유했던 페루 공항이 폐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