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런던의 미술관, 뮤지컬, 음악회
런던에서 제일 먼저 들른 곳은 대영박물관이다. 세계 3대 미술관 중의 하나인 이곳에는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고고학 및 민속학과 관련된 유물들이 많이 소장되어 있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로마, 중동, 아프리카 등지로부터 수집해온, 혹은 약탈해온 문화 유품들로 가득하다. 그곳을 돌다 보면 그 방대한 물량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전시물들이 좁다고 아우성치는 것 같다.
그 넓은 박물관 한 귀퉁이에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관. 많은 한국인들이 그곳을 다녀가면서 그 작은 규모에 초라함을 느끼고 뒤가 부끄럽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작지만 잘 정돈되어 있었다. 물론 충분하진 않지만. 이 박물관이 대영제국의 제국주의적 약탈물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감안하면, 한국의 전시물이 적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재가 그 손길에서 벗어나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며 위안을 삼아 본다.
또한 다른 전시관들의 그 현란함과 그로 인해 느껴지는 얼마간의 조잡함에 비해, 한국관은 여유롭고 단아하다. 특히 한국 가옥은 곳곳에서 그 단아함이 묻어났다. 하얀 창호지와 격자무늬, 그 위에 검은색 문손잡이와 걸쇠의 그 단순하고 정갈한 느낌, 벽에 걸린 붓의 그 절제된 선.
외국인들의 반응을 보고 싶어 한참을 그곳에서 머뭇거렸다. 한 중년의 외국인이 한국 가옥을 보면서 함께 온 이에게, "Very nice!"라고 말한다. 그러나 새로 지은 모형이라 너무 깔끔한 게 문화재의 느낌보다는 오히려 모던한 느낌을 준다. 옛 것의 재현이라기보다는 현대적 변용이라고나 할까.
미술관 내부의 계단을 오르는데 하얀 대리석의 은은한 느낌이 너무 좋다. 대영 박물관의 이집트 관, 그 방대한 전시물들을 보면서 꼭 애들을 데려와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으로 들른 곳은 내셔널 갤러리다. 그곳에서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고갱의 그림들은 화집에서 본 것보다 톤 다운된 느낌이고, 고호의 그림에서는 생기발랄하게 뛰노는 소년의 모습이 연상된다. 그 밝은 빛과 생동감 있는 붓터치는 잠시도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소년들을 볼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은 화면에서 빛이 난다. 특히 조르주 쇠라의 그림은 그 화사함에 눈이 부실 지경이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그 통통한 팔을 한 번 꼬집어보고 싶은 느낌이 들게 한다. 화집을 통해 보아도 훌륭하지만, 화면에서 유독 빛이 발하는 것 같은 쇠라의 그림들은 미술관에서 실물로 보았을 때, 그 느낌이 확연하게 살아나는 작품들이다.
다비드, 들라로슈 등, 1700년대 후반 화가들의 작품은 섬뜩하리만치 사실적인 인물 묘사로, 화면 속 인물들이, 그 눈과 손가락이, 곧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들라로슈의 '레이디 제인의 처형'에는 왕위에 오른 지 9일 만에 물러나고, 얼마 후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처형당하는 제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눈이 가려진 채 겁에 질려 더듬더듬 참수대로 향하는 소녀의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애틋한 한숨이 터져 나오게 한다.
- 들라로슈, '레이디 제인의 처형' : 광주동물보호협회 위드 (daum.net)에서 이미지 인용.
내셔널 갤러리에서 내려다본 트라팔가 광장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과 광장으로 내려와서 보는 것이 많이 달랐다. 계단을 내려가 광장 안으로 들어서면 사람들이 그 광장을 즐기는 모습과 웃음소리, 분수 소리, 바람, 날아오르는 비둘기들의 파닥임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너무나 유쾌하다. 자유여행의 맛은 이런 건가 보다. 무한한 자유로움. 자유 또한 지켜보는 것과 직접 누리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곳은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해방구 같다.
런던은 훌륭한 뮤지컬로도 유명하다. 오늘은 코벤트 가든의 캠브리지 극장에서 첫 뮤지컬, ‘Fame'을 볼 예정이다. 너무 기대된다. 시작 전 10분, 음 조절하는 드럼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설레는 마음. 내 뒤엔 할인 티켓으로 내 티켓의 반값에 들어온 한국 팀이 있다. 아! 배 아프다! 사촌이 논 산 것처럼.
26일에 공연하는 ‘I'll rock you’의 스탠딩 티켓을 예약했다. 둘 합치면 45파운드로 평균 22.5 파운 드니까 괜찮은 가격이다.
런던에서는 종종 멋진 흑인들을 볼 수 있었다. 미술관 뜰에서 두툼한 흰색 니트 풀오버 스웨터를 입고 있던 흑인 남자는 무척 지적으로 보였다. 지금까지 가졌던 흑인에 대한 일반적인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뮤지컬 ‘페임’에서도 그들은 돋보인다. 춤에서나 노래에서나 파워에서나. 그들에겐 뭔가가 있다. 백인에게는 없는 뭔가가. 흑인들의 그 정신적, 육체적 파워는 어디에 기인하는 것일까. 그 터져버릴 것 같던 에너지.
뮤지컬 ‘Fame', 을 보면서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동으로 눈물이 투두둑 떨어졌다. 런던 뮤지컬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던 공연이었다.
런던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곳 사람들이 아무 데서나 샌드위치를 먹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겐 점심시간이 단순히 먹는 것 만이 아니라, 일단 허기를 채우고 난 나머지 시간을 광장이나 공원, 여유로운 거리의 벤치에 앉아 최대한 편안하게 쉬면서 보내는 시간인 것 같다. 그들은 포장된 샌드위치와 과일, 가벼운 빵과 음료를 봉지에 담아와 잔디밭에 앉아서, 혹은 걸으면서 먹는다.
도로에서는 신호등에 빨간 불이 켜져 있거나 말거나, 사람들이 그냥 길을 건넌다. 그러면 차들은 칼같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정중하게 그 앞에 선다. 사람들이 차들 속에서 헤엄쳐도 교통사고가 나지 않을 도시. 그들에겐 차 안에 타고 있는 이들보다, 아니 차보다는, 걷고 있는 사람들이 존중의 대상이라는 것이 너무나 명백해서 그것이 참 인상적이었다.
로열 앨버트 홀에서 7월 19일부터 9월 14일까지 열리는 세계 최대의 클래식 음악 축제, 프롬스(BBC Promps)의 티켓을 예약했다. 유로스타를 탈 때 아낀 돈으로 꽤 좋은 자리를 손에 넣었다. 내셔널 갤러리에서 너무 지쳐 녹초가 되었는데, 이 표를 들고 나오니 너무 뿌듯하다. 21.5파운드.
바로 앞이 캔싱턴 파크다. 가랑비가 뿌리는 공원에서 큼직한 커피를 한잔 사들고 혼자 걷는다. 자유!!
널따란 잔디 사이에 곧고 크게 뻗은 길과 풀이 자란 작은 길이 있는데, 어느 길로 갈까 고민하다 작은 길로 들어선다. 길 양 옆에 자라고 있는 풀들, 그 빛깔, 여러 가지 색채를 뭉개 놓은 듯한 형언할 수 없이 부드러운 빛깔. 너무 예뻐서 그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옮길 수 없음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조깅하는 사람들, 산책하는 사람들이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로워 보인다.
풀밭에 조금 간격을 두고 마주 서있는 백인 여자와 흑인 남자 커플이 참 잘 어울린다. 백인 여성과 흑인 남성은 묘하게 잘 어울린다. 부드러움을 대표하는 것과 힘을 대표하는 것의 만남이어서일까? 벤치에는 한 할머니가 앉아서 편안하게 쉬고 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정녕 축복받은 이들이다. 영국이 지금 와서 옛날의 영화에 미치지 못하는 경제력과 정치적 파워를 갖고 있다 해도, 그것이 이렇게 시민을 위한 정책에 중점을 두고 있는 때문이라면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물론 런던의 모든 이들이 다 이런 여유를 누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민박하고 있는 동네만 해도 아침 일찍 산책해보면, 삭막한 달동네 같은 곳이다.
외로움이 스며들 틈이 없는 이 완벽한 자유. 이곳은 지금 가을처럼 춥다.
캔싱턴 가든을 나와 로열 앨버트 홀로 갔다. 빈 좌석은 그대로 둔 채 사람들로 가득 찬 스탠딩 석에서 다들 선채로 공연을 본다. 모두들 매우 진지하다. 그러나 경직되어있지는 않다. 나는 졸려서 첫 곡인 엘가의 곡을 놓쳤다. 두 번째 피아노 협주는 현대 음악인 것 같다. 곡이 쾌활하고 위트가 있다. 지휘도. 피아노 연주자도 모두 멋지다.
졸졸졸 개울 물이 흐르듯이 맑고 안정감 있는 메조소프라노의 노래. 숨죽인 청중들.
퇴근길에 바로 왔는지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양복 차림으로 스탠딩 석에 서서 관람하던 관객들이 곡이 끝날 때마다 환호하며 박수와 휘파람을 보낸다. 한곡씩 끝날 때마다, 참고 참았던 기침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는 것도 감동적이다. 런던의 공연들은 진행될수록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다.
외국에 나오니 입이 정말 중요하다. 뭔가 미심쩍다 싶으면 바로 물어봐야 한다. 오늘도 기차 시간표에 4번이라고 쓰여있어서 4번 플랫폼에 가서 기차를 타려다가, 혹시나 하고 물어보니 역시 아니란다. 15~19번이라고 하길래 15번 플랫폼까지 가서 도착하는 기차에 또 용감하게 타려다가, 다시 물어보니 또 아니란다. 전광판을 보면, 거기에 플랫폼 번호가 뜨는 거란다. 딴 기차 타고 1시간 동안 갈 뻔했다.
런던이 뭐 특별히 깨끗하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서울이나 내가 사는 도시나 뭐 다 비슷한 정도다. 로열 앨버트 홀로 가는 길은 크고 깨끗한 아파트들로 훤했다. 어디에나 빈부 차는 있다. 영국의 억양, 특히 남자들의 말투는 정말 억세다. 알아듣기가 무척 힘들다. 관광객들이 그들에게 길을 묻는 것이 한두 번이 아닐 텐데도, 그들은 귀찮아하지 않고 대부분 매우 친절하다. 특히 할아버지들은 더 친절하다.
워털루 역에서 플랫폼 번호를 알려면 전광판을 보라던, 그래서 그 앞까지 나를 데려가 가르쳐주던 그 할아버지도 그렇고. 그러고도 20여분 후에 전광판 앞에 다시 갔을 때에도, 또 옆에 와서 애초의 플랫폼 번호보다 한 단계 뛰었다고 넌지시 말해주고 가던 할아버지의 다정한 얼굴. 길을 물을 때나 가르쳐 준 뒤에 고맙다고 말할 때, 환히 웃으면서 격식을 갖춘 영어를 구사하면 그들도 무척 좋아한다.
모든 게 순조롭다. 혼자 여행하는 데는 여백이 있어서 좋다. 이렇게 틈틈이 일상과 느낌을 기록할 수도 있고. 내 시선이 내가 아닌, 동행과 함께 하는 우리가 아닌, 내가 머무는 도시의 다른 사람과 대상을 향해 한껏 열린다는 것도 좋다. 친구들끼리 온 한국인 배낭여행자가 혼자 온 나를 보고, 기다릴 때 심심하지 않으냐고 묻는다. 심심해본 적은 없다. 늘 뭔가로 채워지곤 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