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옥스퍼드가 좋았던 것은

- 2002, 마흔의 내가 나에게 선물한 유럽여행

by Annie


옥스퍼드를 종착지로, 도중에 윈저 성(Winsor Castle)과 이튼 스쿨(Eaton College)에 들르는 일정이다.

윈저성은 아래 사진에서도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듯이,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성이자 세계에서 가장 큰 성으로, 튼튼한 요새의 기능에 중점을 둔 곳이다. 엘리자베스 현 영국 여왕이 가장 좋아하는 성이어서 자주, 오래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여행 당시의 기록이 없어서 윈저성의 인상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성의 내부가 화려한 치장에 비해 좀 답답해 보인다고 느꼈었다. 그래서 산책로에 들어섰을 때의 그 탁 트인 시원함이 참 좋았다. 그곳 나무 그늘에 앉아 운동화 안에서 몸살 하던 발을 벗고, 잠시 나를 쉬게 해 주었다. 윈저 성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었다. 내가 찍은 유일한 윈저성의 사진이 그 산책로였던 이유이기도 하다.



?fname=http%3A%2F%2Ft1.daumcdn.net%2Fencyclop%2Fm87%2FAgKHsxNBXpirMj250R6zsYTuWL9KWUWlhMTC9Qz5%3Ft%3D1462262037000 윈저 성 - Daum 백과에서 이미지 인용



eb219aac5a072f409ad233ea276d19903e97e259 무위자연無爲自然 | 윈저성(Windsor Castle) 전경 - Daum 카페의 이미지 인용



img20220110_15191171.jpg 윈저 성의 끝이 보이지 않는 산책로



윈저성을 나와서 간 곳은 영국의 명문 사립고등학교인 이튼 스쿨이다. 드디어 한국인이 한 명도 안 보이는 곳에 왔다. 가이드의 영어 설명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하다. 실제 캠퍼스를 다 보진 못했다. 썸머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보였는데, 검은 양복 속에 약간 짓눌린 듯한 어리숙해 보이는 어린 얼굴들이다. 보고 싶었던 교정은 못 찾겠다. 아니면 따로 교정이 없나?


img20220110_15225626.jpg 이튼 스쿨



img20220110_15111032.jpg 이튼 스쿨의 고풍스러운 교원 식당



이튼 스쿨을 나와 옥스퍼드에 가려했더니, 차비가 11.5파운드인데 지갑을 보니 37파운드밖에 없다. 런던까지 돌아갈 차비 17파운드에 숙소는? 밥은? 입장료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니, 언제 이렇게 다 써버렸지? 교외로 나오니까 돈이 팍팍 든다. 거기에다 런던에서 공연 티켓을 세 번이나 샀으니. 돈이 떨어지니까 힘이 없고 걱정이 생겨 어깨가 늘어진다. 어떻게 하나? 호텔에 신용카드로 묵을까? 아님 현금 서비스를 받을까? 에이, 어떻게든 되겠지. No problem. Don't worry.


돈이 떨어져 보길 잘했다. 영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가더라도 타는 기차마다 각종 예약비가 있을 것이고, 매 항목의 비용을 조금이라도 초과하지 않아야겠다. 매일같이 2잔씩 마시던 카푸치노도 한잔으로 줄여야겠다.




옥스퍼드에 도착하기까지의 우여곡절도 만만치 않았다. 갈아타는 곳에서 엉뚱한 기차를 타는 바람에, 내려서 또 다른 기차로 갈아타야 했다. 물어보고 갈아타야 한다는 말까지는 알아듣겠는데, 가르쳐준 두 사람 모두 똑같은 말을 하는 것 같은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 수가 있어야지. 이번 정거장인가 하고 내리려 하는데, 내가 내릴 곳을 물었던, 옆에 있던 남자가 나를 붙들며 말한다.

“Next stop. Almost here." 그는 다음 정거장에서 같이 내렸는데, 또 손으로 방향을 가리키며 바로 앞의 차가 옥스퍼드 행이라고 알려주었다.

“Just one stop."

"Thank you so much."

환하게 웃으며 말했더니, 마주 웃는 그의 얼굴이 너무 보기 좋다. 스마트 정장 차림의 정말 잘생긴 남자였다.

'매너도 훈훈한데 외모까지 참 훈훈하네.'


기차에 타보니 ‘이거 잘못 탄 거 아냐?’하는 생각이 들만큼 너무 좋은 차였다. 시침 뚝 떼고 앉아서 가는데,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이 너무 좋다. 아! 유럽은 정말 축복받은 땅이다. 돈 떨어져서 다시 런던으로 돌아가야 하나 했는데, 그대로 오길 너무 잘했다.


옥스퍼드 역에 도착했는데 역 안의 인포 센터가 문을 닫아서, 한참 동안 어떻게 하나 망연히 서있었다. 그때 등에 커다란 백팩을 짊어진 외국인 여행자가 역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서 붙임성 있는 태도로

내가 묵을만한 숙소를 하나 추천해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역의 이곳저곳을 돌며 벽에 뭔가 숙소에 관한 정보가 있나 찾아다녔고, 나도 그를 따라 역을 빙 돌았다. 그 큰 배낭을 메고 역을 두어 바퀴 돌던 그는 마침내 맞춤한 곳을 찾았나 보다.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더니 예약이 가능한지 물어봐주었다. 그리고는 내게 지금 가면 된다며, 역에서 그곳까지 가는 길을 너무나 친절하게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멋진 웃음과 양손 엄지 척, 상큼한 윙크를 남기고 그는 떠나갔다.

'고마워. 굿바이, 프렌드.'

그 장면은 이후로도 오랫동안, 생각날 때마다 입가에 미소를 짓게 되는, 내 삶의 달콤한 에너지원이 되어주곤 했다.


숙소는 역에서 가까웠다. 그리고 그곳은 내가 여행지에서 만나고자 했던 이상향 같은 곳, 꿈에 그리던 곳이었다. ‘Backpackers' Youth Hostel'. 들어가 보니, Oh, God! 홀 전체에 왁자한 음악과 사람들의 얘기 소리와 순 외국인들. 꺅!

계단 옆에 엎으러져 책을 읽고 있는 남자, 홀 여기저기에 퍼질러 앉아 맥주 마시는 이들, 홀 중앙의 당구대에서 당구 치는 이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태어나서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너무나도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안내받은 내 침대 위층 침대엔 흑인 남자가 벌러덩 누워 있고, 큰 교실만 한 방에 수십 개나 되는 침대들이 위아래로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가방들은 이리저리 아무 데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약간의 불안, 커다란 흥분. 드디어 모험다운 모험의 시작이구나 싶었다. 하룻밤에 12파운드, 체크아웃할 때 찾아갈 보증금이 5파운드였다.


리셉션 걸은 이곳이 서로 매우 친해지는 곳이라 하는데, 나는 이들과 가까워지는 법을 모르겠으니 어떻게 하지? 담배 연기에 목이 매캐하다. 이럴 때 영어가 조금만 더 되어주어도 아무하고 든 얘기를 할 텐데. 음악이 무지하게 좋다. 이 분위기 너무 좋은 데서 혼자 놀기는 그렇고, 도무지 접근 방법을 모르겠다.


이곳 숙소의 홀에 앉아 음악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쓰는데, 이제 좀 적응이 되고 너무 좋다. 이런 걸 점입가경이라고 하나? 오길 정말 잘했다. 좀 전에 슈퍼가 있나 찾으러 나갔다가 모두 문 닫아서 허탕 치고 돌아오는데, 입구에서 초인종을 눌러도 한참 동안 감감무소식이다. 오늘 밤은 쫄쫄 굶을 판이다.

다시 몇 번을 더 눌렀더니 밥그릇을 손에 든 흑인 남자가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는 바로 계단에 퍼질러 앉아 밥을 먹으면서 묻는다.

“Where are you from?"

그가 먹고 있는 음식을 보니 감잣국에 만 밥이다.

“맛있겠다. 너도 쌀밥 먹는구나. 우리 음식인데.”

침을 꼴딱 삼키며 말했더니 그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조금 줄줄 알았더니 국물도 없다. 정말 대대한 흑인이다. '런던 와서 흑인들 멋있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는데, 넌 꽝이야.'


여기 모인 이 많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서 왔을까? 뭐하는 사람들이고 이들의 삶은 어떤 것일까? 궁금하니?

그럼 입을 열어야지. 난 누구랑 얘기하게 될까?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내가 자리에 앉기 전부터 책상에 공책을 펼쳐놓고 뭔가를 쓰고 있는 남자. 어쩌면 난 일부러 그 앞자리에 가서 앉았다.

모두들 술 마시며 떠들거나 짝을 이루어 얘기하거나 당구를 치거나 하는데, 그래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데, 그에게는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쩐지 이 분위기랑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이다.


Back Street Boys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나이가 있어서 Queen이나 Guns & Roses를 좋아한단다. 이제 겨우 스물일곱 살인 주제에. 뉴질랜드에서 왔다는데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했더니 화들짝 반기며 말한다.

“와우, 나 한국에 가봤는데. 월드컵 때 부산에.”


밖에 나가 좀 걷겠느냐고 했더니 좋다고 했다. 서양 남자치고 말수가 적다.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역사를 좋아한다고 했다. 연대표를 줄줄 꿰고 있다.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해까지. 이름은 마크, 좋은 남자다. 투어가이드를 직업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외국어를 할 줄 몰라서 어려울 거라고 한다.


정치 외교학을 전공했고 주 외국 대사 같은 것을 하고 싶었는데, 어차피 정치나 권력 같은 것에 얽매이게 될 것 같아 포기했다고 한다. 역사가 왜 필요한 지에 대한 얘기,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볼 수 있고 잘못된 과거를 현재와 미래에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등등의 얘기를 했다.


내가 저녁을 못 먹었다고 어딘가 저녁을 먹을 곳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해서 중국집 같은 곳에 들어갔다. 그는 이미 간단한 저녁을 먹긴 했다고 했지만 우린 국수 두 그릇을 시켜 조금씩 남기고 먹었다.


식당을 나와서도 계속 걸으며 얘기를 주고받았다. 엄마, 아버지, 할머니 모두 뉴질랜드 원주민이 아닌 외국 계라서, 그의 얼굴은 유럽인처럼 보인다. 선탠을 하면 다른 뉴질랜드 사람들은 브라운 컬러가 되는데 자기는 레드가 된다고 했다. 그는 앞으로도 두 달 더 영국을 여행할 것이라고 했다.

“젊어서 부럽다.”

“무슨 소리야? 네가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다는 거야?”

“응. 마흔이야.”

“장난해? 너 진짜 어려 보이는데.”

“너 같은 서양인의 눈엔 내가 어려 보이겠지. 하긴 너도 어려 보여. 스물서넛 쯤으로 보여.”


그는 낮에 가봤다는 뮤지엄에 나를 데려가, 그곳에 무엇 무엇이 있었다고, 전시품들이 퍽 흥미로웠다고 했다. 조각이랑 아주 근사한 펜 드로잉도 있다고 했다. 내가 특별히 미술 쪽에 관심이 있긴 하지만 그리고 우리나라에선 꽤 아는 축에 속하기도 하지만, 쟤네들의 기본적인 교양에는 못 미치는 것 같다.


함께 더 걷고 싶었지만 영어로, 아니 딱히 영어가 아니라도 처음 보는 이와의 대화에는 나의 한계가 있었으므로 매끄럽게 더 시간을 끌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산책을 마감하고 들어갔는데, 그는 복도 끝에 있는 내 도미토리 앞에까지 나를 에스코트해주고는 손을 내밀었다.

“Do good traveling."

그는 내 손등에 키스하고 굿나잇 인사를 했다. 매너 있고 착한 남자였다.




호스텔을 일찍 나서서 9시쯤 투어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투어는 아마 열 시부터 시작하는 모양이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보니 바로 옆에 벼룩시장이 있었는데 볼 건 하나도 없었다.

투어 버스를 탔는데 가이드의 말을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프로 정신은 대단했다. 단 5초도 쉬지 않고, 1시간 동안 내내 모든 도로와 건물 하나하나를 열심히 설명해준다. 버스에 탄 모든 사람들이 그녀에게 ‘wonderful'을 외친다. 햇빛에 그을어서 온 얼굴에 주근깨가 퍼져있는, 부석한 머리칼의 마른 그녀는 진정 프로였다.


투어 버스가 잠시 정차하는 동안 내 눈에 띈 것은 애쉬몰리언 미술관(The Ashmolean Museum)이었다. 어제저녁에 마크가 나를 데려와서 소개해주었던 곳이다. 나는 얼른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very very nice! 아니 excellent!'

수집가의 애정이 깃든 소품들. 다른 미술관을 많이 가본 것은 아니지만, 다른 곳에서는 정말 보기 힘든 소장품들이었다.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순간 마크가 보고 싶어졌다. 사진이라도 찍어 놓을 걸. 멜 주소라도 교환해둘 걸. 꼭 한 번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


이곳의 소장품들은 정말 갖고 싶은 것들이다. 전시도 아주 짜임새 있게 되어있었다. 대영박물관의 방대한 소장품들은 어디서든 되는대로 다 걷어다 놓은 느낌인데, 이곳은 그야말로 높은 안목으로 엄선된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하 레스토랑에서 빵과 수프, 카푸치노로 제법 호화스러운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기념으로 열쇠고리를 하나 샀다. 오늘도 ATM에서 20파운드 인출, 도합 40파운드 초과다.


옥스퍼드에서 돌아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런던으로 진입하는데, 와아! 느낌이 새롭다. 고가도로 같은 곳을 미끄러져 내려오며 눈앞에 좌악 펼쳐지는 도시의 모습에 마치 개선이라도 하는 느낌이다. 시내 어디쯤인지 굉장히 번화하고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거리가 보여서 무작정 내렸다.

백화점에 들러 구경하고 나오니 이정표에 하이드 파크가 보인다. 보너스다. 하지만 기대보단 별로다. 캔싱턴 가든처럼 정갈한 느낌은 없는 그냥 평범한 도심의 공원이었다.

1.3파운드나 하는 콘 아이스크림을 사서 영화, ‘연인’에서 제인 마치 같은 폼으로 팔과 한 다리를 난간에 걸치고 서서 먹었다.


코벤트 가든의 극장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We will rock you'의 입석표를 끊었는데, 세 시간 동안 서있어야 한다. 뮤지컬 공연을 기다리는 동안 스타벅스에 앉아 한 시간 가량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멋 낸 사람이 없다. 모두들 되는 대로들 입은 것 같다. 너무나도 평범한 차림들.

어제 호스텔에서 들었던 백스트릿 보이즈와 브리트니 스피어즈의 노래는 정말 감회가 새로웠다. 내일이면 런던을 떠난다. 파리에 대한 기대보다는 런던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크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었다. 심장을 쿵쿵 두드리는 것 같은 드럼과 금방이라도 감전시킬 듯한 일렉트릭 기타 소리. 무대와 먼 좌석 때문인지, 스토리를 이해하지 못한 때문인지, 집중력은 ‘Fame'에 비해 떨어졌다. 배우들의 노래와 춤보다는, 멀리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연주에 신경을 더 쓰다 보니 그랬는지도 모른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자주 웃음이 터지곤 했다. 그들은 왜 웃는 걸까? 대사도, 그 유머도 이해하지 못하는 난 나와 비슷한 처지인 것 같은 옆자리의 프랑스 여자들과 함께 썰렁하게 앉아있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파리, 프랑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