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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프랑스

- 2002, 마흔의 내가 나에게 선물한 유럽여행

by Annie



유로스타가 해저 터널을 지난다고 하는데, 바다를 건너 대륙으로 들어가려면 1~2시간 정도 내내 터널을 지나는 것일까? 투명 창 같은 것으로 되어 있어서 바닷속 풍경이, 물고기랑 해초들이 다 보이는 걸까? 나는 무슨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나올 법한 해저터널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턱도 없는 착각이었다.


비몽사몽간에 20분 동안 터널을 지난다고 하는 안내 방송을 들었다. 산을 뚫은 보통의 터널에 들어선 것처럼 주변이 어두워지길래, 본격적인 해저 터널은 또 있겠지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그런데 그런 터널은 안 나오고 잠깐씩 깨어보면 왠 광활한 들판만 보인다. 생각해보니, '아! 그 20분짜리 터널이 영국과 프랑스를 잇는 그 해저 터널이었고 여긴 영국이 아니라 프랑스구나. 맹하긴.'


그런데 파리 민박집에서 만난 서울대생도 그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파리 도착 예정 시간이 2시 25분인데 한 시간 전에 안내 방송이 나오며 사람들이 일어서서 내린다. 아! 중간에 다른 역을 경유하나 보다 했더니,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는 분위기다. 맞다! 런던과 파리 사이에는 1시간의 시차가 있었구나! 정말 무지의 연속이었다.


역에 내려서 민박집에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국제전화 카드가 말을 안 듣는다. 동전을 바꾸려고 커피를 샀고 그도 부족해서 앞에 앉아있던 영국 아줌마가 0.1유로 동전까지 줬는데, 이 민박집은 전화를 안 받는다. 여행 안내소에 갔더니 호스텔은 알지 못하고 호텔만 취급한다고 하지, 아무나 붙들고 영어로 물어보면 술술 대화가 되던 영국과는 달리 몇 마디 하면 사람들이 뻥 떠서 못 알아듣지, 캐리어는 무겁지..


그 많은 지하철 계단을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낑낑댄 끝에 드디어 민박집에 도착했다. 넓고 깨끗하다. 민박이라기보다는 아틀리에 같은 느낌이다. 화이트 컬러가 주조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은은한 광택이 있는 철제 가구들로 이루어진 넓고 심플한 공간이다.

간단히 샤워하고 소파에 누워 음악을 들으며 한숨 가벼운 잠을 잤다. 편안하다. 하나 둘 사람들이 저녁 먹으러 들어오는데 다시 나갈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서울대 생과 직장을 그만두고 여행 온 30대 남자를 부추겨 야경을 보러 나갔다.


우린 에펠탑 근처의 센 강에서 유람선을 탔다.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파리에서의 첫 날을 공칠 뻔하다 건수를 올려서 뿌듯하다. 12시에 돌아와 보니 와인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에 레드와인과 화이트 와인, 음악,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모여 앉은 이들의 대화가 좀 아쉽다. 어떤 대화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이렇게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그냥 평범하고 좀 어색했었나 보다.

너무 좋았던 런던과 옥스퍼드였는데 과연 파리는 어떨까? 왠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의구심.




여긴 어딜까?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서 콩코드 메트로 역에서 내렸는데 콩코드 광장 안쪽에 무슨 공원 같은 곳이 있었다. 알고 보니 튈르리 정원이란다. 루블 박물관이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이 앉아 쉬고 있다. 지금 밤 9시인데도 오후 4-5시나 된 것처럼 이제 겨우 해가 지려고 한다. 퇴근하고서도 이들에게는 뭔가를 할 시간이 많아서 좋겠다. 우린 퇴근하면 그냥 밤인데.


몽마르뜨 언덕 위에 있는 사크레 퀘르 사원까지 걸어갔다. 경사진 잔디밭에 앉아 운동화를 벗고 맨발로 쉬고 있는데 한 남자가 말을 걸어온다. 처음엔 무슨 구걸하는 사람인가 했다. 말할 때 표정이 조금 일그러지는 게 묘한 분위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불어를 못한다고 영어로 말했더니 그도 서툴게 영어로 말한다. 그냥 산책 나왔단다. 여행은 유럽 여러 나라를 해봤고 독신이고 친구랑 일하고 있다고 했다.


거기서 일어나 계속 함께 걷다가 야외 바에서 맥주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왜 나한테 말을 걸었냐고, 동양 여자라 호기심이 생겼냐고 물었더니 지적으로 보여서란다. 영어를 잘 못하는 때문인지 굉장히 어눌해 보인다. 이름은 프레데리키. 건축가라며 자기 스튜디오에 가보겠느냐고 해서 그럴까 하다가 여행 오기 전, 인터넷을 통해 정보 검색을 하다가 여자 혼자 유럽 여행할 때 조심할 것들에 대한 글을 읽었었다. 혼자 여행하는 여자들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을 조심하라는 내용이 생각났는데 어쩐지, 지금 상황이 그 디테일까지 비슷한 것 같았다. 나는 아니라며 돌아섰다.


그는 내게 전화번호를 적어주고 떠났다. 아.. 파리에서 현지인과 장시간 대화라니 웬 떡인가 싶었는데, 자칫 미끼에 걸려들 뻔했다는 생각에 느낌이 개운치가 않다. 파리.. 런던만큼 좋지 않다.

내일은 무엇을 할까? 미술관은 루블만 가야지. 파리에 매력을 못 느끼므로 월요일엔 교외로 가자. 모네의 집이 있는 지베르니가 좋을까? 스트라스부르가 좋을까? 파리가 지루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오늘은 루블, 퐁피두, 그리고 라 데팡스에 가보자. 어디서든 먼저 커피를 마시고 시작하자. 그런데 루블 미술관 밖으로 나왔다가 주변 거리에 꼼짝없이 갇혔다. 무슨 사이클 경기 때문이라고 했다. 난 프랑스 내의 무슨 체인점들 홍보 차량인 줄 알았는데, 그 사이클 경기를 호위하는 차량들이었단다. 프랑스 저 남쪽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이란다. 몇 시간 동안 계속된 퍼레이드 덕에 선크림을 발랐으면서도 팔에 화상을 입었다. 거리에서 구경하는 무리 가운데 미국에서 온 젊은 여자는 펑크족 같은 화장과 머리, 옷차림이었다. 아주 분방해 보여 보기에 예뻐서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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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이 행렬과 군중의 무리를 빠져 나가기 위해 헤매기를 두어 시간. 겨우 빠져나올만한 통로를 찾아서 다른 곳에 가는 것은 포기하고 민박집으로 향한다. 역시 쏟아지는 졸음. 오늘은 푹 쉬면서 내일 여행 계획이나 세우자. 루블에서 사 먹은 2.1유로짜리 아이스크림 맛은 끔찍했다. 루블은 좋았지만 그래도 파리는 별로다.

대부분의 것들이 돈 값, 이름값을 하는 것 같다. 루블은 루블의 명성에 값했고, 대영 박물관은 무료인 만큼 무질서했다. 학교면 학교, 미술관이면 미술관, 뮤지컬이면 뮤지컬, 일반석과 스탠딩석도 모두 돈을 낸 만큼 달랐다.


루브르에서 만났던 시크한 파리지엔 같아 보이던 그곳의 직원 사진을 찍었다. 그 옆에 있던 대리석 의자의 느낌도 너무 좋아서 함께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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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20220110_15295537.jpg 대리석 의자의 느낌과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의 부드러운 느낌이 잘 어울린다.



내일은 루앙에 간다. 원래는 스트라스부르를 계획했었는데, 그곳으로 가는 테제베가 없는 탓에 4-5시간이나 걸린다고 해서 포기했다.

사실 여행 떠나면서 원래 목표했던 곳은 '모네의 집'이 있는 루앙의 지베르니였다. 파리에 삼일 동안 머물면서 다소 실망했었다. 이상하게도 파리에서는 말을 걸고 싶은 사람이 별로 없다. 여기가 파리인지 아프리카인지 종잡을 수가 없다. 너무 많은 흑인들. 파리에서는 백인들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모두 휴가를 떠난 탓도 있겠지만. 이곳 흑인들은 런던에서 보았던 흑인들보다 훨씬 가난한 모습이다.

이렇게나 많은 흑인들이 거의 파리를 점령하다시피 해도 그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파리의 관용으로 해석해야 할까?


파리의 냄새. 런던에서 파리 행 유로스타를 탈 때부터 시작해서 파리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심해지는 특유의 냄새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내 몸에도 그 냄새가 배는 것 같다. 아이스크림을 먹다 팔에 흘려서 팔을 들어 올리는데 아, 내 팔에서 그 냄새가 나는 것이다.


민박집주인 정희와 어젯밤 와인을 마시며 오래 얘기를 나누었다. 남자 친구의 이름은 카지, 일본인 유학생이다. 파리에 온 지 얼마 안 되서부터 만났는데, 올여름 민박을 시작하면서부터 서로 갈등이 쌓여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단점들이 눈에 띄면서 힘들다고 했다.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하는데서 오는 부담감, 게다가 민박집 손님들이 모두 한국인이어서 그는 말도 안 통하지, 그래서 늘 외곽을 맴돌아야 하는 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정희도 그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것을 이해하고 그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만한 여유가 그녀에게도 없단다.

사랑하던 커플 사이도 힘들어지는 순간이 있다. 그녀의 말대로 좋을 때는 하나부터 열까지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땐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만 작용하는 것 또한 그 관계인 모양이다. 그들이 슬기롭게 이 고비를 헤쳐 나가기를 바란다.


이곳 파리는 너무 덥다. 런던의 그 시원했던 날씨를 비롯해 온통 런던이 그립다. 인간에게 의사소통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파리에서 절감하게 된다. 런던에서는 누구에게나 말을 붙일 수가 있어서 참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다. 그러나 이곳은 한마디 하고는 막히게 되는 경우가 많아 나도 좀처럼 입을 열지 않게 된다.

민박집에서 여주인 정희와 한국인 여행자들이 모여서 와인 파티를 할 때, 동석해있으면서도 웃을 듯 말 듯 애매한 표정으로 짓고 있던 카지의 심정을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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