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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베르니, 모네의 집

- 마흔의 내가 나에게 선물한 유럽여행

by Annie


루앙에 간다. 나는 파리에 대해 무엇을 기대했던 것일까? 아니, 무엇을 기대할 만큼 아는 것이 있기라도 했을까? 아니었다. 그저 막연히 파리는 멋진 곳일 거라는, 문을 열고 나서면 그 모든 멋진 것들을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무더운 파리의 거리는 인적이 드물었고 어디 가나 쉽게 마주칠 것 같았던 멋진 파리지엥, 파리지엔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그저 말 한마디 주고받을 사람도 없이 혼자서 미술관 근처를 맴돌았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가볼만한 곳, 예쁜 거리나 편안한 카페 등을 검색해서 유유자적할 수도 있었을 것을 그때는 혼자 하는 해외여행에 서툴기도 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날이라도 그렇게 덥지 않았더라면 훨씬 나았을 텐데.


드디어 파리를 벗어난다. 1등석이지만 그리 깨끗하진 않다. 여긴 왜 열차 바닥까지 모두 카펫을 깔아놓는지 모르겠다. 정 그러고 싶으면 청소나 잘해주지, 청소 안 된 카펫은 정말 찜찜하다. 좌석은 넓었고 차의 흔들림도 거의 없긴 했다. 유레일 패스를 제시하니까 1등석 티켓이 공짜로 나와서 신기하다.


루앙 역에서 내려 숙소를 찾아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야 하는지 알 길이 없다. 인포에서 지도를 얻었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침 역 앞을 지나가는 남녀 경찰이 눈에 띄었다. 그들에게 달려가 지도를 보여주며 가려는 곳을 가리켰다. 그들이 불어로 뭐라고 했지만 난 알아들을 리가 없다. 난 영어로 묻고 그들은 불어로 답한다. 그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서로의 짧은 외국어로 나와 소통하려 애썼다.


그러나 내가 여전히 어리둥절해하자 그들은 나를 데리고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내가 탈 열차를 가르쳐주려나 했더니 아예 나와 함께 열차에 타는 것이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의 그들은 자기네의 짧은 영어를 멋쩍어하며 연신 웃음을 터트렸고, 우리 셋 모두는 서로 한 마디씩 서툰 말을 할 때마다 마주 보며 깔깔대고 웃어댔다.


지하철에서 내려 한참을 걸으니 내가 찾던 호텔이 나왔다. 그들은 호텔 주인에게 호텔비와 체크아웃 시간까지 물어보고는 서툰 영어로 내게 알려준다. 너무 고맙다고, 두 사람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했더니 둘이 함께 벽에 붙어 서서 포즈를 취해준다. 다시 한번 ‘메르씨 보꾸’를 외치며 그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들은 몹시 즐거워하며 돌아선다. 어떻게 경찰들이 저렇게 순박할 수가 있지?



img20220110_16090327.jpg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준 친절한 경관들



img20220110_16073125.jpg 루앙 역 안에서 만난 프랑스 할머니


역 안의 인포 앞에서 잠시 함께 앉아있던 할머니도 그렇고, 샌드위치 가게 점원도 그렇고, 이 경찰들도 그렇고, 루앙은 파리를 벗어난 소도시라 그런지 시골 마을 사람들처럼 순박하기 그지없다.


체크인하고 루앙 시내를 좀 돌아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여행안내 책자에 나와있는 ‘뮈세 드 보자르’는 책에서 소개한 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 모네의 ‘루앙 대성당’이 눈에 띄었고 ‘천사 소년’이 눈길을 끌었다. 르누아르의 작품도 놓치지 말라고 해서 물어보았더니 꽃을 그린 정물화 한 점밖엔 없었다. 런던에서도 파리에서도, 그리고 이곳 루앙에서도 시슬리의 작품이 아주 많았다.




루앙에서 벌써 1시간째 길을 헤매고 있다. 숙소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못 찾겠다. 돌아보면 다시 그 자리. 이 도시는 어디서나 루앙 대성당이 보인다. 다른 길로 갔나 싶으면 다시 그 성당의 다른 쪽 방향이다. 한참 가다 고개를 들어보면 성당의 첨탑이 보이고 또 열심히 많이 걸었나 싶어 둘러보면 또 한쪽 첨탑이 보이고, 마치 유령처럼 사방에서 그 성당이 출몰한다. 생긴 것은 귀신 나게 생겨가지고. 그나저나 꽁꽁 숨은 숙소는 어찌 찾아가나. 거기 두고 온 책과 세면도구만 아니면 이대로 루앙 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가고 싶다.


숙소는 정말 다시 들어가고 싶지도 않은 곳이었다. 그 퀴퀴함이라니. 가이드북의 숙소 안내는 정말 믿을 것이 못된다. 주변 어디에도 먹을 것을 살만한 곳이 없는 것 같다. 겨우 샌드위치 가게를 하나 찾아서 샌드위치 한 개와 콜라, 물을 한 병 샀다. 샌드위치 하나가 하루 분량은 되는 듯 크다. 가게 점원이 이것저것 물어보며 자신의 영어 실력을 테스트하느라 즐거워한다.


숙소를 찾는 동안 너무 지쳐서 도로 한쪽 잔디밭에 맨발로 앉아있는데, 맞은편 분수대에 안에 한 남녀가 홀랑 빠졌다가 나온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거나 말거나 전혀 개의치 않고 젖은 채로 그 옆 잔디밭에 드러누워 얘기를 나누다, 키스하다 하며 둘밖에는 없는듯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국에서의 나는 나를 향하지도 않을 시선에 스스로 갇혀서, 가면을 쓴 것처럼 살았던 것 같다. 다른 많은 한국인들도 아마 나와 같지 않았을까? 불특정 다수의 시선 때문에 길에서나 어디에서나 딱딱하게 굳어진 표정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참으로 그 시선에서 자유롭다. 자유롭지 않아야 할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곳에서는 여자들이 끈 나시를 입을 때, 끈 없는 브라도 아니고 브라 끈을 그대로 다 드러낸 채 다닌다. 처음엔 놀랐는데 이젠 하나도 거북하지가 않다. 그러나 여행 중에 마주친 한국인들의 끈 나시는 여전히 눈에 설다.

몸에 딱 달라붙은 옷들, 파인 옷들, 끈으로 된 옷들이 유럽 여성들에겐 너무나 자연스럽고 멋진데 왜 한국인들의 그런 모습은 어색할까?

아마도 수많은 외국 영화에서 익히 봐온 모습들에 익숙해져서가 아닐까? 한국영화나 티비에서 한국 여성들이 흔히 그런 모습으로 나왔더라면, 일반 한국인들의 그런 모습도 자연스러워 보이지 않았을까?




천신만고 끝에 숙소에 도착했다. 샤워하고 방에 들어가 양쪽 창문을 열었더니 마파람이 너무 시원하다. 오래된 집이라 그런지 하나도 덥지 않고, 이 더운 날 오히려 스웨터를 걸치고 있는 형편이다. 끊임없이 새소리가 들려오고 차 소리는 아주 간간이 한 번씩 들릴 뿐 무척 조용하다. 들어와 있으니 생각했던 것보다 시원하고 조용한 것이 쾌적하다.

낡은 의자에 흰 수건을 깔았더니 그 역시 쾌적하다. 불어 회화 책을 뒤져서 시트라는 말에 해당하는 불어를 찾았더니 ‘드라’였다. 리셉션으로 내려가서 ‘돈네 무아 르 드라’라고 했더니 시트 두 장을 준다. 우와!


침대 위 이불이 찝찝했었는데 역시 입이 보배다. 꽃무늬 이불 위에 하얀 시트를 깔아놓으니 침대도 쾌적해졌다. 좋다. 샤워든 뭐든 눈치가 보이던 민박을 떠나 이렇게 한적한 곳에 내 마음대로 있을 수 있어 너무 좋다.

루앙의 하이라이트, 이 호텔이다. 거미줄도 끼고 방이 방치된 것처럼 보이지만, 가구들이 고풍스럽고 방 한쪽엔 세면대도 있어, 자기 전에 거기서 양치도 할 수 있고. 옛날엔 행세 꽤나 했던 호텔인 듯싶다.


하지만 허름한 입구, 주인 할아버지의 얼굴, 낡은 카펫이 깔린 좁은 나무 계단, 너무 낡은 의자와 침대, 가구들, 그리고 이 안에서 주인 할아버지와 친구 외엔 한 명도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 적막함만 떠도는 곳.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 극에나 등장할 법한 호텔이다. 한편 편안하면서 또 한편 오싹하기도 하다.

여행 떠난 후 정말 마음 놓고 편안하게 푹 쉬었던 곳, 간간이 들리는 성당의 종소리도 좋고 끊임없이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아침에 눈뜨는 기분도 최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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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흐리면서 쌀쌀하다. 얼마만의 시원한 날씨인가. 비가 내렸는지 축축해 보이는 거리와 나무들. 모네의 집이 있는 지베르니에 가기 위해 베르농 행 열차를 탔다. 베르농 역에서 지베르니까지는 걸어서 1시간 30분이 걸렸다.


오래 걸었지만 지베르니까지 가는 길은 너무 즐거웠다. 한국에 돌아가면 좁은 마당과 집이지만 정말 잘 가꾸며 살아야겠다. 넝쿨 장미도 올리고 자두나무도 심고 창도 깨끗이 닦고, 가능하면 레이스 커튼도 달고.

가는 길에 보니 잔디처럼 짧은 풀들이 펼쳐진 넓은 뜰에 큰 나무 한 그루, 거기에 매어진 그네가 참 평화로워 보였다. ‘행복한 나의 집’의 표본을 보는 것 같았다. 가는 길이 너무 예뻐서 지루한 줄 모르고 걸었다. 그러나 모네 거리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발목이 아픈 데다 지쳐서 이제 그만 걷고 싶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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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기념관을 지나쳤는데 알고 보니 그곳을 통과해서 모네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정원에 막 발을 들여놓고는 벤치에 앉아 다리를 좀 쉬어주고 있다. 날씨가 서늘해서 너무 다행이다. 내가 지금 모네의 정원에 있는 게 맞나 실감이 나지 않는다. 감개무량하다. 모네의 정원을 돌아보며 부러움을 넘어 질투가 느껴졌다. 이렇게나 넓고 좋은 정원을 차지하고 살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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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20220110_16422035.jpg 모네의 '수련' 연작이 떠오르게 하는 연못



지베르니에서 돌아오는 길. 구름에 가려졌던 해가 나오고 다리도 아팠다. 올 때는 날도 흐려서 시원했고 신기한 마음에 멋모르고 좋았는데, 그 먼 길을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아득했다. 잔뜩 무거워진 다리를 끌며 히치 하이킹이라도 할까 하는 생각도 했다. 거부당하기라도 하면 그 무안함과 우울함을 어떻게 감당할까 싶으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을을 벗어나 큰길로 접어들었을 때 차 한 대가 교차로에 선다. 그냥 비켜서는데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길을 물어보는 건가 해서 “I'm a stranger here." 했더니 ”Go to Vernon?" 하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타라고 한다. 와! 땡잡았다. 영어를 거의 모르는 프랑스 커플이었다. 그들은 겨우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말만 알아들었다.


그래도 유럽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을 알았다. 그들은 말끝에 늘 football을 덧붙인다. 그해 한국에서 열린 2002년 월드컵의 위력을 실감한다. 그들은 베르농 역 아주 가까이에 나를 내려주며 짧은 영어로 길을 가르쳐 준다. 나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연거푸 ‘메르씨 보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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