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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피두 센터와 뤽상부르 공원

- 마흔의 내가 나에게 선물한 유럽여행, 2002

by Annie


퐁피두 센터에서 한나절을 보내고 나면 남는 시간이 별로 없을 텐데, 파리와 친해지지 못하고 떠나려나보다. 너무 컸던 기대가 실망을 준 건지도 모른다. 쁘랭땅 백화점에도 잠깐 들렀는데, 그곳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남자고 여자고 대부분 키가 작았다. 여자들은 이목구비는 크면서도 피부가 동양인처럼 맑은 게 인상적이었다.


퐁피두 센터는 한눈에 예감이 좋았다. 입구에서 짐 검사하는 한 흑인 직원이 처음에는 나를 보고 ‘곤니치와’ 하더니, 나의 어벙한 표정을 보고는 금방 ‘안녕하세요’ 한다. 난 뭐라고 말도 못 하고 반가운 표정으로 “어? 어?”만 하고 지나온다. 그만큼 한국인 여행자들이 많아진 것이리라.


미술관 카페에서 오랜만에 카푸치노를 마셨다. 이 카페는 물도 준다. 물도 있는데 영양제를 먹을까?

파리에서는 마치 벽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다. 미술관에서 줄을 설 때나 길을 물을 때나 또 메트로에서나, 모두 말이 통하지 않는다. 범람하는 불어, 그 불어의 바다에서 난 한 점 섬 같다.

프랑스인들은 자국의 문화와 언어에 대한 긍지가 높지만, 자기가 영어에 서툰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계면쩍어했다. 또한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이들은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다른 나라에 갈 때는 최소한 그 나라의 말 몇 마디 정도는 익히고 가는 것이 예의인 것 같다. 물론 여행자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도 그렇다


퐁피두 센터는 역시 최첨단 미술관이다. 현대 미술의 선정성과 클래식한 분위기가 공존하는 그곳은 그 자체로 현대 미술의 현재적 존재다. 멋진 건물과 조망, 전시된 작품들도 근사하다. 퍼포먼스 비디오 작품들이 흥미로웠고 마티스, 칸딘스키, 레제 등의 작품들이 눈에 띄었다. 마크 로드코, 도널드 져드, 피카소의 작품들도 좋았다.


특히 칸딘스키의 작품들이 실제로 보았을 때 더 돋보이고 좋았다. 마티스. 아, 마티스! 니스에 못 가서 마티스 미술관을 못 본다는 게 큰 아쉬움으로 남았다. 보나르의 작품도 실제로 보니 너무 좋았다. 삶이 환희로 넘쳐나는 것 같은 선들과 그 무르녹는 색채들.

레제의 그림도 좋았다. 노란 바탕에 세 인물의 컴포지션. 웃지 않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서려있는 듯 한 얼굴들. 잘 정돈되고 안정감 있는, 레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한 그림들이었다. 피카소 역시 돋보였고, 딱 한 점밖에 없어서 아쉬웠던 신디 셔먼의 사진도 반가웠다. 반면에 몬드리안은 화집에서 보는 것이 훨씬 깔끔하고 느낌 전달이 잘 되는 것 같았다.


비디오 작품들도 여러 개 있었는데 그중 귄터 브루스의 퍼포먼스(1938년작) 비디오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그것을 보면서 인간은 극한적 고통과 잔학함을 보고 싶어 하는 잠재적 욕망을 갖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카로운 가위 날이 위협적으로 클로즈업되고, 그것으로 아주 위험스럽게 속옷을 찢고, 그렇게 드러난 생식기로 컵에 오줌을 가득 누은 후에, 그것을 들이마신다.

또, 면도날로 머리를 일직선으로 그어, 그 피가 등을 타고 엉덩이까지 일자를 그리며 흘러내리기도 한다. 그 소름 끼치는 퍼포먼스가 영상으로 보여지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눈을 돌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가까이 다가앉고 있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타인의 고통받는 모습에 끔찍해하며 눈 돌리기보다 궁금해하며 그 끝까지 함께 가보고 싶어 하는, 그것을 즐기고자 하는, 그것에서 묘한 쾌감을 느끼는, 그런 인간의 잠재 욕망은 무엇일까?


세 시간 정도 그곳에 머물렀는데 작품이 더 많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퐁피두를 나와서 한참을 걸었다. 어제오늘은 날씨가 서늘하다. 처음부터 그랬으면 파리에 그렇게 질리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파리는 가로수들도 모두 규격에 맞추어 자른다. 상점가에 걸려있는 분홍과 보라색 꽃들이 참 예쁘다.


오나가나 한국인들은 많은데 매번 멋쩍다. 서로 마주 보고 웃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나도 그러지를 못한다. 모두들 외국에 나왔을 때는 그 익명성으로 인한 자유로움을 기대하는데 불쑥불쑥 마주치게 되는 자국민들에게 서로 쑥스러운 모야이다. 뭔가 들킨 것 같기도 하고, 방해받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묘한 감정이다.


꽤 큰 블랑제리에 들어가 초콜릿 케익 한 조각과 사과 파이를 사서 뤽상부르 공원으로 향했다. 런던의 캔싱턴 가든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아기자기하게 잘 손질되어 있어서 예뻤다.

의자에 앉아 정원을 보면서 빵을 먹고 있는데 비둘기가 떼 지어 내 앞으로 몰려든다. 빵부스러기를 뿌려주자 난리가 났다. 이러다 내 발까지 쪼는 거 아냐?


지나가던 한 프랑스 남자가 내게 인사한다. 마주 인사했더니 계속 말을 붙이며 공원을 안내해주겠단다. 내가 샤크레 퀘르 사원에서 만난 프랑스 남자 얘기를 했더니 재미있어한다. 그는 팔짱을 끼라며 팔을 내민다. 호기로 끼긴 했지만 영 편치 않다. 내가 샹젤리제에 갈 거라고 하니까 함께 가자고 한다.


아, 조심해야 하는데. 느낌이 껄끄럽지는 않았지만 너무 친숙하게 구는 데는 좀 부담스러웠다. 인사처럼 볼에 키스하는데 처음엔 관습적인 인사려니 하고 내밀어 주었는데, 또 그러니 부담스러워서 그에게 말한다.

“Don't kiss me any more."

그는 공원을 함께 돌며 이곳저곳에 대한 설명을 해주었다. 작은 예배당 같은 곳도 있었는데 그곳에 들어가 잠시 앉아있기도 했다.


공원을 나와서는 세느 강변을 함께 걸었다. 오늘 세느 강은 이전에 두 번 보았던 것보다 시원하고 아름답다. 강변의 플라타너스 가로수 길도 시원했고. 내 뒷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거북해서, 한국에서는 보통 개의 목덜미를 이렇게 쓰다듬는다고 한 나의 경고를 그는 알아들었을까?

세느강변 산책을 마치고 그에게 이제 그만 가봐야겠다고 했다.

“여기서 안녕하자. 널 만나서 참 즐거웠어. 안녕.”

그러자 그는 프랑스식 비쥬를 하더니 난데없이 내 입술에 쪽 하고 입 맞춘다. 난 “Oh my God!" 하고 외치며 뛰어와 버렸다. 돌아보니 그가 그 자리에 웃고 서있어서 "Good bye!" 하며 손을 흔들고 돌아섰다.


더스틴 호프먼 같던 그 키 작은 남자는 생각해보니,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웃는 얼굴이 장난스럽고 귀여웠던 것 같다. 그가 너무 친근하게 굴지만 않았더라면 금상첨화였을 걸. 내가 넘어간 것이든 그가 유혹한 것이든 그와 걸었던 그 순간의 나는 한 마리 나비 같았다.


하지만 이것은 혼자 여행할 때 상당히 조심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아무리 외국의 풍습이 우리와 다르다지만 역시 너무 친근하게 구는 건 개운치 않다. 다음부턴 내게 말을 걸어오는 외국인과 너무 오래 얘기하지 않기, 좋고 싫음과 지켜야 할 선을 분명하게 표현하기.


난 심플한 삶을 원한다. 그렇지만 그것이 쉽지는 않다. 항상 나의 문을 꽁꽁 닫아둘 필요는 없지만 너무 쉽게 외부에 노출시켜서도 안 될 것이다. 그로 인해 상처받거나 후회할 일이 생길 수도 있으므로. 한국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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