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의 내가 나에게 선물한 유럽여행, 2002
로마 근교의 티볼리(Tivoli)에 있는 어느 추기경의 별장, 내가 '물의 정원'이라 이름 짓게 된 'Villa d'Este'에 갔다. 아침 일찍 수도원을 나서서 중풍기가 있는 노 수녀님의 병원에 들렀다. 어찌 그리 귀여운 할머니가 있는지! 한없이 우리와 얘기하고 싶어 하는 수녀님을 가까스로 떼어놓고 오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9시쯤 도착해서 둘러본 별장의 건물은 기대했던 만큼 근사하지는 않았다. 1670년 경, 당시 유명한 화가가 그렸다는 벽화나 천정화도 지금껏 로마에서 본 것에 비하면 특별할 것이 없었고 각 방들도 평범했다. 위에서 내려다본 별장의 정원도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씩 조금씩 정원 안으로 내려가면서, 이 별장의 진면모를 만나게 되었다. ‘물의 정원’이라 부르는 게 어떨까 싶을 만큼, 각기 다른 형태와 크기의 분수들이 정원 곳곳에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작고 귀여운 분수, 가로수처럼 길게 늘어선 분수, 평화롭게 졸졸 흐르는 시냇물 같은 분수, 양쪽으로 부채처럼 퍼지는 크고 하얀 분수... 뿜어져 나오는 물줄기들이 햇빛에 영롱하게 부서져 내렸다. 분수가 마치 정원에 심어진 나무와 꽃들만큼이나 많다.
어떤 분수 아래로는 네모난 긴 연못이 있는데, 당시에는 그곳에 물고기를 키워 신선한 어류의 맛을 즐겼다고 한다.
건물 아래로 쭉 펼쳐진 정원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계단을 따라 양쪽이 모두 분수 개울로 이어져 있다. 공사로 인해 분수대 물이 멈추지 않았더라면, 이곳은 위에서부터 양쪽으로 계속 물이 흘러내려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흘러내리는 물이 없으니 그저 상상에 맡길 뿐이다.
본체 건물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정원의 화려함에 비해 무척 단순하고, 소박하다 못해 밋밋할 지경이다. 그러나 중앙의 테라스와 계단은 건물 전체의 양식과 달리 세심하게 공들인, 매우 장식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알고 보니 이 테라스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일부러 건물 전면을 심플하게 설계했다고 한다.
정원 한쪽에 있는 구조물에는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늑대 젖을 먹고 있는 두 아이, 로물레스와 레무스가 보이고 물 위에 띄운 배와 수호신도 함께 보인다.
이 별장에는, 그리고 수많은 분수가 흐르는 이 물의 정원에는, 교황이 되려 했던 한 추기경의 욕심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파드레는 ‘한 개인을 위해 이런 별장을 지었다는 게 우습지만...’ 하고 말을 흐린다.
추기경의 사심은 얄미우나 그가 남긴 이 별장은 후세들에게 경탄과 즐거움을 주게 되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새로 보수한 것처럼 보이는 방문들을 보았는데, 그중 한쪽의 색깔이 달랐다. 새로 색을 입혔던 것을 다시 옛 모습으로 복원시키기 위해 벗겨내는 중이라고 했다. 잘한 일이다. 덧칠된 것, 그것도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새 단장은 얼마나 흉해지기 쉬운가. 편리하게 개량된 고대 아피아 가도를 보았을 때의 아쉬움이 떠오른다.
파드레가 우리에게 길거리 피자를 사주셨다. 특별히 우리에게 그 맛을 보여주기 위해 굳이 찾아가서 사주신 건데 정말 맛이 없다. 그냥 딱딱한 감자 칩 같다. 겨우 절반을 먹고 나머지는 종이에 싸서 몰래 버렸다. 그러나 어쩐지 우리가 그렇게 버린 것을 보신 것만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에 걸렸다.
끊임없이 건물 하나, 장식 하나, 그림 하나까지도 소상하게 설명해주시는 파드레. 그의 원래 성격인가 싶기도 하지만, 내가 워낙 모든 것에 신나하고 호기심을 보이니까 더 해주시는 것 같다. 나 편리한 대로 그렇게 생각한다.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은 모두 나더러 밝고 명랑하다 한다. 그렇다. 여행 중에 내가 만났던 누구보다 나 자신이 밝다고, 최소한 밝은 태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주변에 파급시키는 효과에 대해 매번 확신을 갖게 되기 때문에, 난 즐거움을 전파하는 것 같은 나의 그 캐릭터를 즐기고 있다.
수녀원에 돌아와서 차려진 점심상을 보니 배는 하나도 안 고픈데, 걱정될 만큼의 성찬이다. 불고기에 빛깔 좋은 쌈장, 먹음직스러운 오이 무침, 수북한 쌀밥. 정말 할 수 없이 남기면서, 난 밥상을 차려주신 수녀님께 감사와 미안함을 담은 쪽지를 보냈다.
여행 중 황폐해졌던 위장이 여기 와서 기름기가 도는 모양이라고, 아니면 오늘의 활동량이 적었거나. 그렇지만 정말 맛있게 먹었노라고. 난 원래 위대하지 못하고 위소한 사람이라고.
이태리 과일은 정말 빛깔이 좋고 당도도 높다. 햇빛이 강한 데다 비가 적어서라고 한다. 여기서 먹어본 과일 중에 평소에는 좋아하지 않았던 수박이 정말 달고 맛있다.
벌써 내일이 로마 체류 마지막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