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의 내가 나에게 선물한 유럽여행, 2002
피렌체에서 숙소 때문에 곤란을 겪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다들 그렇게 얘기했었지만 그것이 나의 실제 상황이 되리라곤. 호스텔이 모두 차 버려서 기차역 근처의 호텔들을 찾아보니 60에서 100유로까지 부른다.
정처 없이 캐리어를 끌고 걸어가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정말 굵은 빗방울이다. 순식간에 어두워지면서 낮 12시 반인 데도 저녁 무렵쯤 된 것 같다. 아르노강 다리 앞 건물의 처마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마치 태풍이 지나가는듯한 장관이다. 사람들이 쓰고 있는 우산 살이 부러지며 뒤집어진다. 20여분쯤 그러고 있었을까? 좀처럼 그칠 것 같지 않던 빗줄기가 조금 늦추어진 틈을 타 냅다 뛰었다.
한 작은 호텔에 들어가 35유로에 흥정을 하고 짐을 풀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두오모 성당이었다. 심플한 내부. 로마에서 보았던 화려하고 장식적인 성당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내부의 단순함을 스테인드 글라스가 보완해주고 있었다. 숙소 때문에 신경 써서 그런지 성당 안에 있으면서 현기증과 피로가 느껴진다. 밖으로 나와 옆의 지오토 종탑을 올려다보니 아! 멀미할 것 같은 기분이다.
기다란 사각형 종탑 위로 소나기가 지나간 뒤의 쨍하고 푸른 하늘, 그 위를 떠가는 구름들이 종탑 중간에 걸친 듯 흘러가고 있는데 꼭 그 탑 건물이 내게 쓰러질 것 같기도 하고 탑이 움직이는 배처럼 느껴져 초현실적인 분위기다. 마그리뜨의 그림 같다. 두오모 성당 앞에서 보아도, 옆에서 보아도, 그 앞을 떠날 수가 없다.
외관이 너무 장식적인 것 같기도 하지만 그것이 또한 보는 이들을 압도하는 힘인 것 같기도 하다. 정면에 햇빛을 받고 있는 성당은 내가 쓰고 있는 짙은 색 선글라스를 벗으면, 눈이 부셔서 도저히 바라볼 수가 없다. 초록과 분홍색의 대리석은 설마 그것이 대리석일까 싶다가도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걸 보면 틀림없는 대리석이다.
다시 후드득 소나기가 쏟아지는 바람에 두오모 앞에서 잠깐 비를 피하다 옆에 서있는 소년과 얘기를 나누었다. 네덜란드에서 왔다고, 내가 한국인이라니까 무척 반가워한다. 또 한 번 월드컵의 효과를 실감한다. 보이스카웃 멤버로 많이 돌아다니고, 해마다 파리에 가고, 갈 때마다 루블 미술관에 가고 있어서 열 번도 더 가보았다고, 오르세 미술관이 정말 마음에 든다고, 루블은 열 번 정도 가니까 다 보았다는 느낌이 드는데, 오르세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이러니 왜 유럽의 젊은이들이 부럽지 않겠는가. 캠핑장에서 묵고 있다고 했다. 소나기가 그치자 우리는 만나서 반가웠다며 악수하고 헤어졌다.
두오모를 떠나 우피치 미술관에 가기 위해 베키오 다리 쪽으로 향했다. 광장에 들어섰을 때 어디선가 울려 퍼지는 음악.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한 남자가 기타를 연주하고 있다. 로망스. 연주자의 표정과 기타 음향 속에 진한 감상이 우러나는 완벽한 연주였다. 이어지는 아랑훼즈 협주곡 등등. 남루한 옷차림의 별 볼품없어 보이는 외모였지만 그 광장에 울려 퍼지는 기타 소리는 너무 아름다웠다.
다시 이곳 피렌체에서 내 발길을 붙드는 베키오 다리는 그 위쪽의 다리에서 보면 남루한 건물들이 판자촌처럼 들어차서 정말 보기에도 민망했었다. 그러나 실제 다리 안에 들어가 보니 그 건물들이 모두 보석과 액세서리 상점들이라 멀리서 보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우피치 앞에 늘어선 긴 줄. 미술관의 광장은 로마의 나보나 광장을 연상시켰다. 그보다 훨씬 많은 인파가 몰려있다. 이곳 피렌체는 건물마다, 광장마다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있다. 어쩌면 피렌체 전체가 관광객들로 점점이 이어진 도시 같다. 길거리 아무 데나 주저앉아 다리를 쉬고 있는 반바지 차림의 관광객들. 그것이 오히려 이 도시 안에서 더 편안함을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잘 먹고 잘 쉬었던 로마를 벗어나자마자 숙소를 찾아 떠돌고 쫄쫄 굶기도 한다.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줄이 별로 짧아지지 않는다. 특이한 것은 미술관이 밤 10시까지 연다는 것. 벌써 5시다.
우피치 앞에 줄 서서 내내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래도 줄은 아직 멀었다. 눈이 아프다.
우피치! 아, 우피치! 기다란 복도 양쪽에는 쟁쟁했던 로마 인물들의 조각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투스, 트라야누스, 아그리파, 네로....
조각상의 예술성이나 완성도는 평가할 수 없어도 좋았다. 그 인물들의 이름을 되새기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찼다. 복도에는 거대한 천정화가 이어졌다. 이 방대한 양의 작품들을 수집한 메디치는 괴물이 아니었을까?
티치아노의 인물화들은 정말 뛰어나다. 화면 속에서 빛나는 인물들의 표정, 각각의 인물들의 서로 다른 특징, 너무나 섬세하고 자연스럽게 화면에 녹아있어서 만져보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는 피부의 질감과 양감. 지금껏 본 인물화들 중 단연 최고다.
‘Flora'! 아, 플로라! 그렇게 탐스러운 여자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우르비노의 비너스’, 이렇게나 부드럽고 아름다운 곡선이라니. 가슴, 동그마니 나온 배, 통통한 다리와 팔, 손가락. 인간이, 여자가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게 경이로울 뿐이다. 한숨이 다 나온다.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미술관에 간 그리스 로마 신화]티치아노의 <아르테미스와 악타이온> <우르비노의 비너스> : 네이버 포스트 (naver.com)에서 이미지 인용.
너무 지치고 피곤한데, 우피치를 다 보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나는 이곳을 나서고 싶지 않다. 6시 반밖에 안 됐는데 미술관 문을 닫는단다. 닫는 시간을 잘 모르고 온 모양이다. 한편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미술관 문을 안 닫았으면, 피곤함도 잊고 그림에 빠져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보티첼리와 고야의 그림을 못 본 것이 한이지만.
우피치를 나서서 피티 궁전을 향해 베키오 다리를 건넜다. 거리거리마다 틈도 없이 꽉 메운 채 흘러가는 여행자 무리들. 피티 궁전 앞 광장에 이르자 ‘우와!’하는 탄성이 나온다. 너른 광장 여기저기에 무리 지어 앉아있거나 아예 드러누워 쉬고 있는 여행자들. 비스듬한 경사의 광장에서 휴식하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자유롭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늘진 광장에 시원한 바람이 불고 나도 퍼질러 않아 기차에서 준 과자에 테레사 수녀님이 싸준 음료수를 마신다. 피로가 싹 가시는 순간이다. 정면으로 빛을 받고 있는 피티 궁전의 황갈색 건물도 아름답다.
사람들이 정말로 자기를 풀어놓고 쉴 수 있는 공간, 광장은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가. 그러나 이 광장도 진정 여행자들을 위한 광장이었을 때, 이와 같은 느낌을 줄 것이다. 여행자들 자체가 자유로운 존재들이므로. 그들은 휴식할 곳을 원하므로.
피렌체에서의 하루, 대박이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목에 피시방이 보여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들어오는 사람들은 모두 한국인이거나 일본인인 것 같다. 한글로 쓸 수는 있는 모양인데 방법을 몰라 그냥 영어로 쓰고 나왔다.
우피치나 어디나 광장 안의 연주자들, 거리의 화가들, 그것이 그들에게는 힘겨운 생계의 수단일지라도 나 같은 여행자들에겐 진정 즐거움을 주는 이들이다. 피렌체, 지루할 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