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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우피치 미술관에 가다

- 마흔의 내가 나에게 선물한 유럽여행, 2002

by Annie


피렌체의 아침거리. 어제 오후의 관광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다. 생활인들이 먼저 보인다. 우피치 앞에는 개관 전부터 길게 줄이 늘어서 있다. 선물 가게에서 먼저 소장품들을 훑어보고 가야겠다. 광장 입구의 한 카페에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셨는데 값도 싸고 맛도 좋다. 맛이 좋다고 말해도 주방장은 의미를 모르는지 표정이 생뚱맞다.


어제 숙소를 찾으면서 우산을 파는 한 세네갈인과 잠시 얘기했다. 싼 숙소를 찾는다고 난 영어로 말하지만 그는 이태리어와 불어밖에 모른다. 정말 의사소통이 안 되는 이 답답함. 착해 보였는데. 나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데 결국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마침 한국인 관광객이 눈에 띄어 그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녀는 자기가 쓰다 남은 전화 카드도 주고, 숙소를 흥정하는데 함께 따라다녀 주었다. 착한 학생이다.


유럽인들은 한국인들의 여행 행태를 이해 못 하겠다고 한다. 빽빽한 스케줄을 과제 해치우듯 강행하는.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유럽 여행하는데 얼마나 돈이 많이 들며, 그 시간을 내기 또한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일 것이다.

모든 일에는 상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조차도 그에 따른 원인이 있기 마련이니, 누구든 우리만의 잣대로 판단할 게 아니라 숨겨진 그 이유를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한국 여성들뿐만 아니라 일본 여성 여행자들도 정말 뽀샤시하게 화장을 하고 다닌다. 어쩐지 그 모습이 생경하고 예뻐 보이지 않는다. 그들 안에서는, 또는 한국인들끼리 모인 무리 안에서는 맨 얼굴이 상대적으로 좀 초라해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전체 안에서는 그냥 맨 얼굴이 자연스럽다. 그들의 화장한 얼굴을 보면 그냥 그 화장을 씻겨주고 싶다. 백인 여성들도 흰 얼굴보다는 갈색으로 그을린 채 활보하는 여성들이 아름답다고 느껴진다. 그러나 이 또한 나의 편견일 수 있으니.


모처럼 봄이, 여름이 생각이 난다.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환하게 터뜨리는 봄이의 웃음, 초등학생이면 다 컸는데도, 내가 안으려고 두 팔을 벌리면 나의 앉은 다리 위로 엉덩이를 밀고들어오는 여름이, 애써 안 웃으려는데, 삐져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뒤로 돌리곤 하는 여름이의 모습. 안아보고 싶다. 그새 많이들 커버렸을까? 잘 지내고 있으리라고 믿지만 보고 싶다.

사람이 넓어지고 커질 수 있는 그 테두리의 한계는 어느 만큼일까? 나이가 들면서 전반적으로 넓어진다 해도 어느 한 부분은 여전히 멈추어 있기도 하는 것 같다.


줄을 선 채로 모두들 열심히 책을 보고 있다. 물론 우피치에 관한, 또는 이태리에 관한 것들이다. 오늘 아침은 오슬오슬 춥다. 런던 이후로 얼마만의 상쾌한 날씨인지. 여기는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더 눈에 많이 띈다. 대만에서 온 젊은이들도 더러 있다. 우리말로 한국인이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영어로 “I don't understand. We are from Daeman. I am not Japanese"라고 대답한다.

지금 일본에서는 중간 길이로 층을 낸 생머리가 유행인 모양이다. 대부분의 일본 여성들은 그런 머리를 하고 있다.


이 미술관은 780명 정도만을 수용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빠져나온 만큼만 들여보내 준다. 그래서 줄은 별로 길지 않은데 끝없이 기다려야 한다. 하여 서서 기다리다 그만 지치고 만다. 한 시간 넘게 그림 한 점 못 보고 줄만 서고 있다. 심지어 미술관 안에 들어와서도, 일정 인원만 들여보내고 또 기다리게 한다. 어제는 끝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안에서는 그냥 다 들어간 모양이다.


우피치에 오면 쉬고 싶어 진다. 어제도, 오늘도. 간혹 이태리어가 들려올 때, 남자의 말소리에서는 파드레의 억양이, 여자의 말소리에는 카테리나의 억양이 떠오른다. 거의 비슷하다. 이틀 만에 답답하다고 여겼던 수녀원 객실과 역시 이틀 만에 배불러서 못 먹겠다고 했던 그곳에서의 식사가 너무나 그립다.




1300년대 후반부터 1400년대 초. 그림에 금박을 이용해서 사각형의 틀이 아닌 성과 궁전의 윤곽 같은 프레임이 눈에 들어온다.

자코포 벨리니의 눈을 내리깔고 있는 전형적인 성모상. 이 시기의 성모나 인물들의 표정은 약간 어둡다.

보티첼리의 그림들은 정말 환상적이다. 어떤 면에서는 소녀들이 꿈꾸는 순정 만화의 구현 같기도 하다. ‘비너스의 탄생’은 실제로 보면 정말 섬세하고 아름답다. 사각형이든, 원형이든, 아치형이든, 프레임에 완벽하게 들어찬 구성. 보티첼리는 성 모자상이 되었든, 여신상이 되었든 최대한의 장식을 도모한다.


우피치 안의 대리석 기둥들은 무척 화려했고 어떤 방에는 정말 멋진 돔이 있었다. 집무실 같은데 장식이 화려하다보니 좁게 느껴진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압권이었다. 죽어가는 적장의 표정과 그에게서 뿜어 나와, 하얀 침대 밑으로 흘러내리는 핏줄기. 유디트는 마치 도살하는 푸줏간 아줌마처럼 자기에게 튄 피가 좀 귀찮긴 하지만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이다. 여성 화가인 젠틸레스키와 남성 화가인 카라밧지오가 그린 유디트는 각기 매우 다른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흥미롭다. 여자에 대한 여성의 시각과 남성의 시각이 이 두 그림에 단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젠틸레스키의 '유디트' https://blog.naver.com/turbolag14/221921106925에서 이미지 차용.



카라밧지오의 '유디트' https://blog.naver.com/nohproblem88/221094140844 에서 이미지 차용



미뇽(Mignon)의 정물화는 실물보다 더 빛난다. 포도 알, 껍질 벗긴 부분의 흰 속살 안에 비치는 오렌지 알맹이들은 입안에 침이 돌 지경이다.

여성화가 로살바 카리에라의 그림 속 여자, 투명한 얼굴, 푸른빛 가운과 흰 레이스로 둘러싸인 가슴과 터번, 부드러운 붓터치. 갸웃한 얼굴과 약간 비튼 몸통, 길고 흰 목. 아름답다.


우피치! 다시 오길 정말 잘했다. 12시가 다 되어 우피치를 나섰다. 먹는 비용을 아끼자고 스낵바를 기웃거리기만 하다가, 에이, 내가 얼마나 아끼겠다고, 이러면 더 먹고 싶어질 테니 하면서 그냥 들어간다. 욕심껏 빵 3개에 카푸치노, 모두 해서 5.1유로. 생각보다 비싸지 않다. 진작 그럴 걸.

동양 여자들이 카푸치노를 많이 찾나 보다. 나만 보면 카페에서 먼저 ‘카푸치노?’라고 묻는다.


피티 궁전 광장에 주저앉아, 사온 빵들을 풀어놓고 포식한다. 아주 선선한 바람이 부는, 시원한 날씨다. 이렇게 광장에 퍼질러 앉아 글을 쓰는 이 맛, 안 해본 사람을 모를 거다. 이제 들어갈 볼까나?


피티 궁전 안에 있는 보볼리 정원은 평범했다. 그러나 무지하게 넓은 하나의 숲이었다. 군데군데 손질하여 작은 길들이 사방으로 퍼져있는 산이라고 봐야겠다. 중앙에 조각들이 에워싸고 있는 경사진 잔디밭은, 그곳에 사는 귀족이라면 올라가서 굽어볼 만한 곳이겠다.

너무 넓고 햇빛이 뜨거워서 다 돌아볼 수도 없다.


로마 수녀원에서의 그 깔끔한 잠자리와 테레사 수녀님의 음식이 얼마나 따뜻하고 호화로운 것이었는지 새삼 느낀다. 배가 고파서 뭐든 먹고 싶은데, 마땅치가 않고 비싸기만 하다.

피렌체! 너무 새롭고 좋은 것들이 많았지만 숙소 때문에 너무 돈이 많이 들고, 몸도 힘들어서 괜히 빨리 떠나고 싶어 진다. 우피치와 두오모, 피티 궁전과 그 앞 광장, 베키오 다리, 리퍼블릭 광장. 볼 것은 이걸로도 충분했다.


고민과 우여곡절 끝에 숙소는 파도바로 결정했다. 사실은 아직도 고민스럽다. 파도바로 갈지, 베네치아로 바로 갈지.

베네치아로 가자. 파도바에서 내가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어쨌든 피렌체여, 안녕!


아직도 난관은 많다. 베네치아행 열차를 타긴 했지만 숙소도 확실치 않고 (전화 예약은 안 받는다고 지금 오라는데 시간이...) 게다가 아직 뮌헨행 Euro night도 예약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래, 난관이여, 내게 오라. 격파해주겠다.


이탈리아에서는 기차를 탈 때 밖이 아름답다 싶으면, 으레 터널이 나타난다. 터널을 벗어나면 골짜기가 내려다 보이고 드문드문 있는 집들도 아름답다. 스위스는 더 아름답겠지? 여행을 해나갈수록 점입가경이다. 베네치아도 이보다 더하겠지?


런던에서의 그 좋았던 기억들은 이제 까무룩 해지고 밋밋해진다. 우리의 지난 삶도 그러할까? 베네치아까지 1시간 남짓 남았는데 심심하지 않게, 아니 여행에 윤기를 더할 수 있게 얘기 상대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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