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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를 만나다

- 마흔의 내가 나에게 선물한 유럽여행, 2002

by Annie


기차가 베네치아로 들어설 때의 풍경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어떤 도시와의 첫 만남에서 강이나 바다가 보이면 늘 신비롭고 설레는 느낌이다.


도착해서 일단 여성 전용 호스텔에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빈방이 여유로운 것 같아서, HI호스텔을 먼저 시도해보기로 했다. 다행히 그곳에도 빈 침대가 있었다. 16유로. 와우! 숙소 때문에 겪어야 했던 피렌체에서의 고생이 눈 녹듯 사라진다. 정말 영어가 되어주고 있다. 신기해 죽겠다. 영어가 아니고서는 내가 생존할 수 없는 상황. 말이란 그때 느는 것 같다. 이제 국제 전화 이용법도 익혔다.

시도하는 자여! 그대에게 그대의 몫이 주어질지니!


호스텔에서 저녁을 주문했는데 밥에 아무것도 없이 치즈를 녹인 것 같은 멀건 소스만 얹어져 있다. 몹시 목이 말라있던 참이라, 그 느끼해 보이는 밥은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맥주 한 캔을 사서 조금씩 마시며 밥을 먹어보려 했는데 결국 실패하고 버렸다.

그러다 아까운 맥주까지 쏟았는데, 덜 쏟아진 맥주 캔을 틀어잡으려 할 때, 직원이 도와준다며 그 캔을 쓰레기통에 던지려 한다. “Give it to me!" 나도 모르게 외쳤지만 맥주 캔은 이미 쓰레기통 안으로 던져지고 말았다. 으으, 아까워. 내 참 이렇게 맥주가 아까워보긴 처음이다.


다시 맥주 한 캔을 사들고 호스텔 밖의 부두에 앉아서, 노을 진 베니스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이 풍경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간다. 젤뚜르데와 함께 올 수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걸. 무언가를 함께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일단 침대를 좀 정리할까 하고 들어가려는데, 언뜻 한국인인 것 같은 남자가 부두 난간에 나와 앉는다. 들어가서 시트만 확인하고 다시 나와 그에게 말을 걸었더니, 자기도 아까 나를 봤단다. 그가 야경을 보러 가자고 해서, 웬 떡이냐 하며 따라나섰다. 그의 이름은 성모였다.


산마르코 광장! 경이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대낮처럼 환하게 불이 밝혀진 광장에 비둘기들이 떼 지어 날고, 광장을 메운 사람들의 물결이 역동적이다. 음악소리에 돌아보니 작은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유럽 여행 중에 정말 보고 싶었던 것이 바로 저거라고 말했더니, 성모가 “저기도 있는데.” 한다. 저기도, 또 저기도!


우와! 고개를 빙 돌려보니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도처에서 그런 연주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마 각 레스토랑마다 악단들이 있는 모양이다. 아치형으로 된 ‘탄식의 다리’를 건너면서, 난 건물들의 양식에 대해 잠시 성모에게 설명한다. 로코코와 바로크, 르네상스 양식에 대해.


들뜬 마음으로 산마르코 광장을 돌아본 우리는 다시 배에 탔다. 섬에 갈까 하고 알아보니, 밤 10시 30분이라 배가 끊겼단다. 호스텔로 돌아가는 배를 탔는데 멀고 멀게 돌아간다. 밤바다를 보면서 난간에 두 팔을 기대고 서서, ‘좋다’를 연발하면서 즐거워한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게, 아마 배를 거꾸로 탔나 보다. 성모가 말한다. “24시간 운행이니까 밤새 타죠 뭐.” 유쾌한 친구다.


11시 45분에 호스텔에 도착했다. 호스텔 문은 이미 닫혔는데 초인종을 눌러 열쇠를 보여주고 들어갔다. 내일 섬에 함께 가자고, 아침 8시 30분에 여기 식당 이 자리에서 만나기로 하고 성모와 헤어졌다. 다들 자는데 열심히 부스럭거리며 샤워하고, 시트 펴고 누우니, 와~ 좋다! 대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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