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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베네치아

- 마흔의 내가 나에게 선물한 유럽여행, 2002

by Annie


늦게까지 자고 침대에서 뭉그적거리다 일어났다. 잠결에 천둥소리가 들렸다. 비가 내리고 있다. 심란하다. 아침을 먹고 호스텔을 나설 때까지도 빗줄기는 차분히 이어진다. 9시 30분쯤 되니 호스텔 라운지의 불도 꺼버린다. 시설도 친절도 별로인 호스텔이었다.


산마르코 광장에서 배를 내려, 비 내리는 광장을 하염없이 걱정스레 바라보다가 이 글을 쓴다. 피아노 연주가 들리는 카페 옆 기둥에 쪼그리고 앉아서, 어제 떠난 성모가 그립다.


구겐하임 미술관에 갔다.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미술관이다. 잭슨 폴록의 작품. 아무렇게나 물감을 흘린 것 같은데, 참 끌리게 되는 그림이다. 그의 그림은 늘 그랬다. 아마 난 작품 그 자체보다, 그가 작품을 만드는 역동적인 자유로움에 끌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기 전시된 그의 작품들은 그중에서도 수작들인 것 같다. 그의 작품이 아닌 것 같은 두 개의 작품도 새롭고 좋다.


비에 젖은 베네치아. 잿빛으로 흐린 바다와 건물들의 실루엣. 진한 외로움이 온몸을 감싼다. 밤 10시까지 무엇을 하지? 살루떼 산타마리아 성당의 계단 위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제 밤 호스텔에서 준 빵(딱딱해져서 부석거린다)을 뜯어먹으며, 과일 시장에서 산 청포도도 따먹으며 이 글을 쓴다.


이제 더 이상 갈 곳도 없다. 여기 좀 앉아 있다가 산마르코 광장의 야경을 즐기고 그리고는 역으로 가야지. 쉴만한 공원이나 광장은 찾아볼 수가 없다. 선물 가게들만 정말 요란하게 많은 곳이다. 그래서 다시 이 성당에 와서 이렇게 자리 잡고 앉은 것이다. 찾아보면 어딘가 쉴 만한 곳이 있겠지만 하도 자주 비가 내려 움직이기도 쉽지 않다. 이 포도를 언제 다 먹지? 이것도 짐인데.


언니 집에 전화를 했다. 봄이랑 여름이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도 별 얘기를 안 하고 그냥 듣기만 한다. 어색한 모양이다. 언니는 ‘네 딸들 시집살이 힘드니 다음부터는 어떻게든 데리고 다녀라’고 한다. 진심 반 농담 반일 것이다. 나도 그럴 생각이긴 하다.


혼자서 자유로운 여행은 이것이 마지막이다. 우리 애들에게, 엄마가 늘 혼자서만 여행 다니고 자기들은 떼어놓는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싶지 않다. 힘들더라도 이제부터의 여행은 내가 아닌, 우리들의 여행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와 누구와의 만남이 아닌, 우리와 누구와의 만남이 될 것이다. 아니 새로운 것과의 만남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도 들렀다. 베네치아를 그린 대작들이 좀 새로웠지만, 역시 미술관은 우피치 만한 곳이 없다. 비가 그치면 언제 비가 왔나 싶게 하늘도 맑고 지면도 금방 말라버린다. 덕분에 베네치아의 다양한 얼굴들을 보게 된다. 맑은 날, 흐린 날, 비 오는 날, 밤바다, 도심의 야경, 섬들.. 참 특별한 곳이다.


성모는 어젯밤 노숙했을까? 누구를 닮았는가 하면 가수 박진영과 비슷한 이미지다. 대학시절 잠시 사귀었던 선배의 동생, 주경이를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말이 많고 붙임성 좋은 것으로는 내가 가르치는 대철이나 현성이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국제 전화 카드를 이용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드디어 한글로 쓸 수 있는 인터넷 카페를 찾아서 '다모임'에 긴 글을 남겼다. 역 맞은편의 성당 계단에 앉아 빵과 치즈, 낮에 먹다 남은 청포도로 저녁 식사를 해결했다. 그제 밤에 끊어두었던 원데이 티켓으로 오늘까지 배를 이용했다.


역 한 구석에 앉아 성모에게 보내는 글을 썼다.


성모에게

기차는 탔는지, 아님 역에서 노숙했는지. 어제까지는 경어를 썼지만, 지금은 그냥 동생에게 하듯이 말하고 싶다.

어제 너랑 악수하고 돌아서면서 순간 밀려오던 아쉬움. 그리고 오늘, 비 내리는 베네치아를 혼자 떠돌며 느꼈던 너의 부재. 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갑자기 밀려드는 그리움.

기차를 거의 놓치게 된 상황에서도 밤바다가 아름답다고 하던 네가 고마웠다. 너의 절박한 상황 앞에서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 베스트 2중의 한 사람으로 너를 꼽는다. 다른 사람은 옥스퍼드에서 만난 그 사람. 각기 다른 느낌의 사람들이라 순위를 가릴 수는 없지만, 다음날 보고 싶어지는 것도 같다.

광주에 올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오게 되면 꼭 연락해라. 그땐 진짜 맛있는 거 사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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