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의 내가 나에게 선물한 유럽여행, 2002
뮌헨행 야간열차 2등석. 다행히 내 좌석이 있는 콤파트먼트에는 한국인 여행자들이 많았다. 야간 콤파트먼트엔 역시 한국인이 편하지. 함께하는 시간은 짧지만, 말을 섞고 보면 다들 친해지는 느낌이다. 세 명의 여대생은 중. 고 동창이라고 했다. 앳된 얼굴들.
내가 낮에 먹다 남은 포도를 좀 먹겠느냐고 했더니 반색들을 한다. 저녁은 먹었느냐고 물었더니 못 먹었단다. 다른 곳에 돈을 많이 써버려서 오늘 저녁은 굶어야 한다고.
세상에! 아무리 아끼며 해야 하는 배낭여행이라지만, 끼니를 굶어가면서까지 하다니. 아침 식사로 먹으려고 사 왔던 빵과 치즈를 꺼내 주었더니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짠한 마음이 든다.
새벽 4시 반에 인스브루크에서 내려 기차를 갈아타야 한단다. 바로 내 앞자리에는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가있는 남학생이 앉아있다. 미생물학을 전공하고 있지만 한의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싶다 한다.
모두들 떠들 만큼 떠들다 자자고 불을 껐는데, 극단적인 피로감으로 거의 몸이 비틀릴 지경이다. 도저히 잠들 수가 없다. 가끔씩 졸기는 했지만 거의 뜬눈이었다.
아침 7시에 뮌헨에 도착했다. 25유로의 비교적 비싼 호스텔을 예약하고, 앞자리에 앉았던 학생과 함께 퓌센에 가기로 했다. 크롸상과 커피로 아침을 때우고 0.8유로짜리 역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세수도 했다.
퓌센까지는 그 학생과 내내 얘기하며 갔다. 주로 내가 얘기했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지? 여행지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거의 내가 대화를 주도하곤 한다. 새로운 나의 발견이다.
교환학생이 되려면 학교에 할당(미국 5명, 영국은 더 소수)된 수가 있어서 지원자들 중에서 뽑혀야 된다고 한다. 토플 점수가 높아야 하고 학점과 영작문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 영작문도 100여 가지 토픽 중에 무작위로 주어지는 토픽을 골라 30분 내에 작성해야 한다고 한다.
미국에서 받는 학교 수업은 주로 주제 발표를 하는 것인데, 1차에서는 모국어로 2차에서는 영어로 한다. 발표는 Informative speech와 Persuasive speech, 그리고 영어 작문을 해야 한다. 좋은 수업 방식이라 여겨진다. 전공과목도 들을 수는 있지만 너무 어렵다고 한다.
퓌센의 노이슈반스타인 성은 기대했던 것만큼 환상적이지는 않았다. 주변 풍경이 예뻤고 동행과 많은 얘기를 나누긴 했지만.
퓌센에서 뮌헨으로 돌아오는 차창 밖 풍경은 정말 아름답다. 넓게 펼쳐진 초록의 목초지, 그 가운데로 곡선을 그리며 뻗어있는 길. 더러는 둥그렇게 흐르는 맑은 개울물. 그러나 이 아름다운 풍경에도 하염없이 잠이 쏟아진다.
그 친구는 프랑크푸르트로, 난 뮌헨의 숙소로 각각 다른 길을 향했다. 숙소에 들어가 샤워하고 방에 있는데, 어? 웬 남자가 들어온다. 혼성 호스텔이었구나. 한국인이었다. 서로 반가워했고 함께 스파게티도 요리해 먹었다.
보니까 그는 버너에 니콘 카메라, 망원 렌즈, 디지털카메라까지 아주 한 살림 준비해왔다. 스파게티에 내가 사 온 치즈를 넣고 볶아서 맛나게 먹고, 설거지는 내가 해주었다. 남은 초코파이를 한 개 주었더니 달게 먹는다.
그가 함께 영국 정원에 가자고 해서 화들짝 반기며 따라나섰다. 낮에 마주친 한국인 남매랑 함께 가기로 했단다. 어려 보이는 남매는 사이좋은 연인처럼 보였다. 비 오는 뮌헨 거리를 우산 받고 걸으면서, 그쪽 남동생과 얘기를 주고받았다.
약간 어리숙해 보이기는 하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내 룸메이트와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했다. 서로 얘기가 통했고 매너도 무지 좋다. 가식이 아니라 원래 성품인 것 같다. 그는 자기가 앉았던 마른 의자를 내 젖은 의자와 바꿔주고 방석도 갖다 주었다.
우린 주문한 네 가지 맥주를 전부 한 모금씩 돌려가며 맛보았다. 그중 하나는 과일 향이 나는 맛있는 맥주였다. 흑맥주도 시켰다. 다들 맛은 좋았다. 우리가 그렇게 떠들썩하게 웃어가며 맥주를 돌려마시자, 옆자리에 있던 어떤 가족들이 쳐다본다. 우린 멋쩍게 웃으면서도 계속 맥주를 돌려 먹는다. 너무 즐겁다.
비가 들쳐서 셔츠 뒷자락이 축축이 젖고 의자도 젖었다. 옆의 그 남자가 냅킨으로 의자를 닦아준다. 그것도 대충이 아니라 아주 세심하게. 뭐 이렇게 자상하고 매너 좋은 남자가 다 있나? 내가 딸린 자식만 없고 10년만 젊었어도, 어떻게 스토리를 엮어보겠다만, 하하. 그러나 내 타입은 아니었다. 내 타입이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이 여행에서 느낀 건데, 내 딸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이성에 대한 감정에는 조금이라도, 95가 좋은데 나머지 5퍼센트라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과감히 'No' 하라는 것. 100퍼센트 확신이 있을 때에만 진짜인 거라고. 난 그랬던 적이 있었나? 없었으니까 지금도 다시 돌아온 싱글이지.
그의 누나도 귀여운 여자다. 우린 함께 사진도 찍었다. 화장실에 들렀는데 환상적이다. 꽃무늬 유리 같은 소재의 초록빛 세면대, 변기 위에도 투명 소재로 밑에 꽃무늬가 들어있는 커버가 씌워져 있다. 이런 화장실은 난생처음이다. 카메라를 가져올 걸 하며 나랑 함께 간 그의 누나가 발을 동동 구른다.
이 남매는 프랑스 시떼가 여행 중 제일 좋았다고. 그곳에서는 전 세계에서 모인 사람들이 함께 얘기하며 논다고 한다. 거기서 아주 성격 좋은 한국인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정말 사소한 화제 하나로도 사람들과 두 시간은 너끈히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는 보통 인사치레로, 자기 사는 곳에 오면 한 번 들르라고 얘기하는데, 그 사람에게는 꼭 와야 한다고, 안 오면 절대 안 된다고 사람들이 그러더란다. 영어라곤 땡큐, 쏘리, 예스, 노 정도밖엔 못하는데도.
대체 어떤 사람일까? 정말 궁금하다. 외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해놓은 브러셔도 몹시 갖고 싶어 했다는데, 해외여행을 할 때 준비해 가면 정말 좋을 것 같다.
넷이서 함께한 ‘영국정원’은 너무 좋았다. 너른 잔디밭 사이로 난 길. 그 사이로 흐르는 꽤 넓은, 개울인지 강인지 모를 물길도 무척 인상적인 풍경이었다. 함께 얘기하며 걷고 있는 남자도 괜찮았고.
강 위에는 우아한 백조와 오리들이 함께 노닐고 있었다.
인적 끊긴 거리를 걸어 나오다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탔다. 내일 아침은 그쪽 호스텔에 가서 몰래 먹자는 거사도 함께 도모했다. 성공하면 정말 신날 텐데. 서로 즐거웠노라 작별인사를 했다.
비어 페스티벌이 있다고 해서, 비가 내려 아마 취소됐을 거라면서도 구경삼아 갔던 것인데, 생각지 않게 좋은 시간이었다.
예기치 못한 만남이나 발견은 항상 기쁨 곱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