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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코텍 미술관과 호프브로이

- 마흔의 내가 나에게 선물한 유럽여행, 2002

by Annie


아침에 헤어진 한국인 룸메이트는 왜 그렇게 냉소적이고, 뚱하고, 불평이 많은지. 눈치를 보느라 커피를 한잔 사주었더니 금세 헤벌쭉 웃는다. 그래도 가끔씩 그렇게 확 풀어지는 표정과 웃음 때문에 봐줄 만하기는 했다. 어제저녁 스파게티도 고맙고, 더구나 영국 정원에 나를 데려가 주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좋은 시간을 가질 수도 있었으니.


오늘은 피나코텍 미술관에 간다. 다시 예술의 바다에서 헤엄칠 생각을 하니 뿌듯하다. 멋모르고 반바지에 점퍼를 입고 나왔는데 에고, 다리가 시려 죽겠다. 아마 오늘 같은 날 반바지 입은 사람은 뮌헨 시내에서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더운 파리와 로마에서도 안 입었던 반바지를 어쩌자고 이 추운 날에 입었단 말인가.

비 내리는 뮌헨 거리. 아주 운치 있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다리만 아니라면 진짜 분위기 있게 걸어 다닐 텐데.


이곳 사람들은 거의 아웃도어 점퍼 차림이다. 우리나라 다음으로 많이 입는 것 같다. 베네치아에서는 비가 내리면 그렇게 마음이 성가시더니, 5유로 주고 산 우산 하나로 이제 비가 내려도 세상 무서울 것이 없다. 사실 살다 보면 작은 것 한 가지를 구매함으로써 용기백배해질 때가 있다.


피나코텍의 세 미술관 건물 중에 먼저 노이에 뮤지엄부터 들렀다. 조각관을 둘러보았는데 정말 한적한 분위기에 주변 정원도 깔끔하고 사람도 별로 없다. 앉아서 스케치하는 사람, 삼각대를 놓고 사진 찍는 사람. 다들 좋아 보인다.


미술관도 아담한 것이 좋다. 대영 박물관이나 내셔널 갤러리, 루블처럼 큰 곳은 작품 양이 너무 방대해서 하나하나의 작품들이 귀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작은 미술관들은 하나하나 눈여겨보게 된다.


보티첼리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애도’. 찌릿하다. 성모 마리아의 옆에 활처럼 몸을 뒤로 젖힌 채 쓰러져있는 예수, 흐느끼는 막달레나, 발밑의 여자는 보티첼리가 그린 여자들 특유의 느낌이 있다. 실신한 마리아, 축 늘어뜨려진 그녀의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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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 이야기)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애도’, 굿뉴스 가톨릭갤러리 (catholic.or.kr) 에서 이미지 인용.



라파엘의 ‘성가족’에서 보이는 그 명료함과 순도 높은 색채, 안정적인 구도. 라파엘과 다빈치의 여성들은 코도 비슷하다.


루벤스의 ‘큐피트의 활 다듬기’. 화려한 날개, 투명하게 반짝이는 살갗, 돌아보는 큐피트의 눈빛. 루벤스의 여자들과 아이들은 살빛이 희다 못해 투명하다. 루벤스의 피부 표현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까지도 조명을 받아 빛나는 것처럼 투명하다.


또 다른 루벤스의 작품, ‘아기 대학살’. 아기를 찌르려는 병사의 칼날을 손으로 움켜잡는 어머니, 그 손에 배어있는 피, 안고 있는 아기를 뺏어가려는 병사의 팔을 깨무는 어머니, 칼에 찔려 죽은 아기를 뺏기지 않으려는 듯 안고 있는 어머니, 병사의 발길 아래서 죽은 아기를 감싸고 있는 탈진한 어머니, 이전의 몸부림을 상상할 수 있는 모습이다. 이 그림은 언제 보아도 소름 끼치고 가슴이 찌릿하다.


미술관에선 배가 좀 고파야 한다. 물론 지치고 피곤하겠지만 졸린 것보다는 낫다. 미술관을 나와 오랜만에 양껏 마셔보는 카푸치노가 좋다. 갑자기 내 학생인 수동이의 순박한 얼굴이 떠오른다. 메일 한 번 써주어야겠다.




늘 궁금하고 가보고 싶었던 ‘Hard rock cafe'에 드디어 입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음악이나 춤, 술 등으로 떠들썩하게 즐기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동경하는 마음은 언제 어떻게 내 안에 생겨났을까? 그것과는 너무나 먼 일상을 사는, 나의 내면 어디에 이런 분위기와 어우러져 나를 분출하고 싶은 마음이 웅크리고 있는 것일까?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도 모두 나처럼 이런 것들이 자리하고 있는 것일까? 내 속에 흥이 유난히 많은 것일까?


하드락 카페는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조금 작은 스크린을 통해 충분히 즐길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바에 앉아서 코로나 맥주를 시켰다. 4유로니까 뭐 우리나라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여긴 락 카페가 아닌가.

혼자 앉아서 발을 까딱까딱 흔들고 있다. 손장단을 맞추기 시작하니까, 어라! 혼자서도 신이 난다. 한쪽에서는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손뼉들을 치고 난리다. 여기나 한국이나 노는 모양은 다 같은가 보다.


‘호프 브로이’에도 갔다. 그 분위기는 알 수 있었지만 내가 낄 자리는 없었다. 사람들이 빽빽이 들어앉아 있어서, 서울에서 본 커다란 비어홀보다 더 못한 느낌이다. 하드락 카페보다 여기가 훨씬 낫기는 하다. 조금 외롭긴 하지만.

동양인이라곤 나밖에 없다. 귀에 익은 음악이 나온다. 음악소리가 더 컸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악단은 없고 이렇게 티비 모니터만 나오는 건가? 좀 시시하다. 하드락 카페든, 호프 브로이든 혼자서 갈 데는 아니다. 동행이 있어서 함께 떠들썩하게 즐겨야 제격인 곳이다.


원래는 낮에 미술관에서 만난 한국인 여대생이랑 8시에 만나 함께 가기로 했었다. 그런데 만나기로 한 신 시청사 앞에서 8시 20분이 되도록 기다려도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혼자 길을 물어 ‘호프 브로이’에 갔던 것이다.

나보다 먼저 유럽여행을 다녀왔던 선희 샘이 혼자 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곳이라고 해서, 그리고 한국인끼리 만나면 쉽게 얘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냥 혼자 갔는데, 뭐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것은 선희 샘과 나의 성향 차이, 소통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리라. 젊고 붙임성 좋은 선희 샘이야 누구하고 든 어울리는데 문제가 없었으리라. 하지만 난 그러지 못한다. 옆 자리의 남자는 줄곧 담배를 피워댄다. 혼자서 와도 각자 관심 없이 나름대로 각자의 분위기를 즐긴다. 그래서 편하긴 하다. 이젠 외국인과도 별로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한계에 이른 것인가?


어제 호스텔의 룸메이트들, 오늘 룸메이트일 영국 여자, 모두 말이 너무 빠르고 정도 안 간다. 이전의 한국인 룸메이트가 편했다. 베네치아에서 만난 성모나 다른 한국인 여행자들이 내게 더 많은 감흥을 주었고, 이참에 다양한 한국인들을 접해본다는 것도 나름 의미 있는 것 같다.


굶으면서 여행하는 한국의 대학생들을 보며, 또 뮌헨에서 만난 뚱한 룸메이트처럼 야간열차로 숙소를 대신하기 위해 장거리를 별 의미 없이 이동하는 것을 보며, 저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그러나 어엿한 직장인으로 돈을 벌고 있는 나도 여행 경비가 빠듯한데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대학생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바에서 나왔는데 아뿔싸! 겨우 10시가 넘었는데 거리에는 인적이 없다. 어쩌다 한 두 명 정도밖에 안 다니는 밤거리를 혼자 걸어오는데 거의 공포감이 들 정도였다. 인적 없이 어둡고 긴 거리에서 뒤를 돌아보니 남자 한 명이 나를 따라오는 것 같다. 15분 남짓 되는 숙소까지 걸어가려 했는데 안 되겠다 싶어, 눈에 보이는 지하철역으로 얼른 내려갔다. 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로 밤늦게 혼자 돌아다니지 말 일이다. 인터넷 카페에 들르려 했었는데 그도 안 되겠다. 그냥 호스텔로 직행하자.


새로 옮긴 호스텔에 돌아와, 방으로 안 가고 로비에 앉아 이 글을 쓴다. 옆에는 한국인 대학생 세 명이 앉아서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는 사람들끼리 놀러 와서 저러는 것도 괜찮지 싶다. 내 앞자리엔 한 외국인이 혼자 앉아서 맥주를 홀짝이며 책을 읽고 있다. 내일도 여기에 묵으면서 잘츠부르크에 다녀와야겠다. 스위스로 이동할 열차를 예약했다.


여기 호스텔 도미토리는 거의 1인실 같다. 11시 30분 넘어서 들어왔는데 방에 불만 켜져 있지 아무도 없다. 커다란 바게트 1개와 버터를 사 왔는데 혼자 있어서 꺼내 먹었다. 정말 맛있다. 버터는 또 왜 이리 고소한 지.

자려고 했는데 아까워서 잘 수가 없다. 여행 정보를 좀 더 찾아보고 자야지.




오늘은 잘츠부르크(Salzbroug)에 간다. 4유로 주고 호스텔에서 먹는 아침은 환상적이었다. 햄, 치즈, 우유, 주스, 콘플레이크, 코코아, 버터, 사과, 오렌지, 빵이 무제한. 샌드위치를 만들어 점심까지 챙겨 오니 흐뭇하다.


8시 40분쯤, 기차를 눈앞에서 놓치고 인터넷 카페에 갔다. 35분에 1유로다. 한글 쓰기는 안됐지만 메일은 읽을 수 있었다. 뮌헨은 오늘도 비가 내린다. 아무래도 맑은 날의 뮌헨은 못 보고 떠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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