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ie Aug 05. 2022

'바람흔적 미술관'에 가면 잎 지는
소리가 들린다

 - 가을여행 2018


  '바람흔적 미술관'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었다. 다만 '섬이 정원' 주인이 그곳까지 가는 단풍나무 길이 예쁘다고 해서 가보고 싶었을 뿐이다. 키 작은 단풍나무들이 앙증맞게 서있는 조금 짧다 싶게 여겨지는 길이었다. 전망대처럼 보이는 길가에 너른 주차장이 있어서 차를 세웠다. 


  산이 물에 잠긴 호수가 보였다. 호수에 대칭으로 비친 산 그림자가 커다란 고래 머리와 입처럼 보이는 게 정말 살아있는 것처럼 움찔하게 하는 느낌을 주었다. 사실 고래의 입모습을 제대로 본 적은 없지만 고래만큼이나 큰 물고기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진을 좀 더 찍고 나서 표지판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미술관을 찾아갔다. 대형 바람개비들이 호숫가를 따라 줄지어 서있고 그 앞에 큼직한 단층 건물이 있었다. 아직 오픈 시간이 안 된 것 같아서 건물을 한 바퀴 따라 돌았더니 옥상으로 가는 계단이 보였다.


  옥상에는 몇 개의 큰 테이블과 벤치들이 있었다. 그곳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미술관 앞뜰과 호수, 물에 잠긴 산,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 또 다른 산들, 맑고 정말 파란 하늘, 그와 선명하게 대비되는 하얀 선 같은 구름, 따스한 햇빛, 공기, 비길 데 없는 자유로움...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거기 한 없이 앉아서 그 모든 것들과 함께하고 싶었다. 전시 작품 하나 본 게 없었지만 나는 이 미술관이 좋았다. 내려올 때 보니 ‘야외 조각 공원’이라는 팻말도 있었다. 여기가 좋았으니 거기도 한 번 가보자 싶은 마음이 들었다. 









  마른 낙엽들이 서걱이는 숲길을 걸어 올라가니 툭 던져 놓은 것 같은 조각 작품들이 낙엽들 틈에서 빠꼼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한 조각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다가, 휙 불어오는 바람에 잎이 후드득 떨어지는 소리가 몇 방울 비 소리처럼 들렸다.


  고개를 들어 위를 보니 빨간 잎들이 춤추듯 날리며 서로 부딪혀서 사르륵 소리를 낸다. 눈으로 귀로 코로 피부로 동시에 와닿는 숲의 술렁임에 온몸의 감각이 열리는 듯했다. 

  이 여행은 사람과의 만남도 명승지를 찾는 것도 흥미진진한 사건도 아닌, 온전히 가을과의 만남이다. 

  난 좀 전에 갔던 미술관과 이 조각공원을 하나의 '바람 흔적 미술관'으로 묶는다. 바람흔적 미술관은 혼자 가는 것이 좋다. 바람의 흔적을 잘 느끼도록. 











  편백나무 휴양림으로 가는 길가에는 알록달록 물든 산이 커다랗게 물에 잠겨 있었다. 너무나 가깝게, 낯설고도 매혹적인 모습으로. 차로 스쳐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풍경이었지만 차를 세울 곳이 없었다. 이렇게 안타깝게 스쳐간 길들이 남해에는 무수히 많았다. 


  편백나무 숲에 이르렀을 때 나는 곧게 나있는 포장도로를 벗어나 그 아래로 난 숲길을 걸었다. 앞서가며 얘기를 나누고 있는 한 그룹의 사람들을 피하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좀 더 내려가니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고 개울물 소리에 지나는 사람들 소리는 모두 묻혀버려 좋았다. 단풍잎들이 떨어져 있는 개울은 물이 맑아서 속이 서늘하게 들여다보였다. 나는 개울의 물소리를 동영상에 담았다. 





  개울이 끝나면서 다시 포장도로로 올라서야 했다. 한참 올라가니 포장도로도 끝나고 흙길이 시작되었는데 낙엽들이 두터운 요를 깔아놓은 것처럼 쌓여있었다. 그 위를 사각거리며 걷다가 그 소리를 담고 싶어서 또 동영상을 찍었다. 

  

  이 여행에서는 여러 가지 소리들이 크게 다가온다. 바람소리, 파도 소리, 잎 떨어지는 소리, 마른 낙엽 밟는 소리, 개울물 소리, 새소리... 


  1.6km쯤 되는 전망대까지의 등반길로 접어들었지만, 나는 바로 포기하고 그곳 벤치에 주저앉았다. 도전하듯 전망대를 향해 올라가는 여행이 아니라 그냥 편안하게 즐기는 시간이고 싶었다. 그곳에 앉아 바람에 잎 지는 소리를 동영상으로 따려고 몇 번 시도했는데 결정적인 순간을 한 번 놓치고 나서는 잘 되지 않았다.


  편백나무 숲을 나와, 바람흔적 미술관에 다시 들러 오픈된 전시공간을 휙 둘러보고, 그곳 카페에서 맛 좋은 커피와 슈크림 빵을 맛본 후 나는 남해를 떠났다.




작가의 이전글 독일마을이 들려준 이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