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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Aug 04. 2022

독일마을이 들려준 이야기

  - 가을여행 2018


  그렇게 쿤스트 라운지에서 충분히 쉬고 나와 게스트하우스를 검색해보았다. 젤 모던한 이름을 골라서 전화했다. 저녁때 다시 걸어 나올 만한 거리인가 물었더니 쿤스트 하우스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다고 했다. 과연 주차장에서 차를 빼자마자 그가 말한 편의점이 보였다.

 

  다녀본 중 남해에서는 가장 호스텔 분위기에 가까운 아주 기능적인 곳이었다. 모든 것이 약간 촌스럽기까지 했다. 역시 손님은 나뿐이어서 나는 다시 4인실 같은 1인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주인 총각은 나를 세워두고 이야기가 끝이 없다. 그동안 이야기할 사람이 없어서 말이 무척 고픈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체 독일 마을이 뭐하는 데냐고, 사람들이 여기 왜 오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는 그냥 독일식 집 들일 뿐이라고 했다. 그것도 살고 있는 집들이라 들여다볼 수도 없는. 

  남해에서 갈만한 곳 하면 대표적으로 뜨는 곳인데 그냥 주황색 기와들을 얹은 성냥갑처럼 똑같이 생긴 집들만을 기반으로 관광지를 만들어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는 것이 조금 놀라웠다. 


  사실 남해는 특별한 유적지나 절 같은 곳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도처에서 바다가 보여 아름답다는 것 외에는 사람들을 유인할 만한 포인트는 없었다. 그러나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다 보니 그 사람들을 유치하기 위해 해오름 예술촌이니, 양 떼 목장, 작은 미술관 같은 소소한 구경거리를 관광객들의 구미에 맞게 조금씩 확장시켜 심심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은 여행자에게도 그것은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았다.

 

  지도상으로는 '바람흔적 미술관'이 내가 제일 먼저 들르기로 된 곳인데, 난데없이 전혀 다른 방향인 '해오름 예술촌'과 '독일 마을'로 건너뛰게 된 것에 대한 궁금증도 풀게 되었다. 주인의 말로는 상주 은모래 해수욕장에서 바람흔적 미술관까지 직선으로 올라오는 길은 없다는 것이다. 독일마을까지 해안선을 타고 올라와서 굽어진 길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난 방에 짐을 풀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미처 다 내려가 보지 못한 길을 따라갔더니 금방 끝에 이르게 되는 독일 마을은 참 작았다. 그 길 끝자락에 아담하고 꽤 예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 보였는데 브레이크 타임인지 문이 닫혀있었다. 그 옆에 카페만 열려있을 뿐.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레스토랑들은 저녁식사는 안 하고 점심때만 문을 여는 것 같았다. 





  난 다시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반대편 길 끝에는 원예예술촌 맞은편 언덕에 ‘파독 광부, 간호사 기념관’이 있었다. 기념관은 마을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서 한쪽에는 전망대라 불리는 곳도 있었다. 거기서 내려다보면 몇 그루 키 큰 소나무들 사이로 독일마을의 정경과 멀리 바다 풍경이 보였다. 


  전망대 옆의 기념관 입구를 기웃거리다가 티비 프로그램 ‘알쓸신잡’에서 유시민 작가가 언급했던 곳이라 들어가 보았다. 입구에 들어서면 좁은 통로로 이어지는 벽면에 사진과 긴 설명들이 있었다. 


  60년대 초, 전후의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70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들 중 하나였다. 외자 유치가 절실했던 한국에 어떤 나라도 차관을 주려하지 않았던 차에, 독일에서 자국의 기피 직업이었던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조건으로 차관을 제공하게 되었다. 


  당시 국내 임금의 10배에 달하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모집 광고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지원했고 쟁쟁한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1만여 명의 젊은이들이 독일로 떠났다. 사진을 보니 남자들은 양복에 말쑥한 겨울 코트를 차려입은 부르주아 지성인들처럼 보였고 여자들은 화려한 한복 차림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희망과 의욕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탄광에 배치된 광부들은 아침에 지하 5백 미터 갱도에 들어갈 때마다 ‘살아서 보자’는 인사를 주고받았고 저녁이면 온몸이 시커멓게 석탄을 뒤집어쓴 채 안도의 숨을 쉬며 갱도 밖으로 나오곤 했다. 그들 중에 사망자가 70명이 넘었고 부상자가 1,200명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 


  출국 때의 그 말쑥한 모습과 갱도에서 온통 까만 석탄 먼지를 뒤집어쓴 그들의 그 대조적인 사진에 마음이 울컥했다. 어린 간호사들 또한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일 간호사들이 기피하는 온갖 허드렛일과 시체를 닦거나 중환자들의 간병인 역할 등의 험한 일을 도맡았다. 


  그렇게 번 돈의 80퍼센트는 당시 외화가 절실했던 한국으로 송금되었고 실제 그들이 보낸 외화는 전후 곤궁했던 한국의 재건에 커다란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그때 독일로 건너갔던 분들과 독일에 살고 있던 가족들 중에 세월이 흘러 고국에 돌아와 살고 싶은 이들이 여기에 터를 잡고 모여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독일에서 건축자재들을 직접 수입해서 독일식 집을 지었고 정부와 지자체가 마을의 기반 시설을 보조했다고 한다. 


  기념관을 돌아보는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가라앉은 마음으로 기념관을 나와 걸어 내려오다 달리 갈 곳이 없어서 다시 쿤스트 라운지에 들러 맥주를 한 잔 시켜놓고 잠시 글을 썼다. 





  게스트 하우스에 돌아갔더니 주인 총각이 또 말을 시작한다. 밤에 옥상에 올라가면 별이 쏟아질 듯 반짝인다고 했다. 그는 웹디자인 등 컴퓨터에 능해서 남해 읍내에 관련 학원을 열 생각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전에 먼저 결혼을 해야 한다고, 결혼하면 이 게스트 하우스 운영을 아내에게 맡기고 자기는 학원 운영을 하고 싶다고.


  나는 결혼보다는 학원을 여는 것이 먼저일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여기서는 사람 만나기도 어렵고, 그래도 읍내에서 학원을 운영하다 보면 사람을 만나게 될 기회도 더 많고 결혼하기도 더 쉬울 거라고.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떠오르는 대로, 물정 모르는 시골 총각에게 도움이 될 거라 여겨 했던 말일 테지만,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쓸데없이 오지랖을 떠는 꼰대 노릇을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타인에게 섣부른 지적이나 충고를 하는 것이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득이 될지, 오히려 기분을 상하게 하여 실이 될지 판단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저녁 시간도 길고 해서 글을 좀 쓸 양으로 작은 책상 같은 것이 있나 물어보았다. 작은 것은 없고 큰 것이 있다고 해서 보니 엄청 크고 길었다. 둘이 끙끙대고 계단을 올라 2층까지 옮겼다. 난 벙크 배드 대신 바닥에 깔린 2인용 매트리스에서 자기로 해서 그 위에 책상을 올렸더니, 병원 침대 위에 펼쳐진 접이 식탁의 거대 버전 같았다. 그곳에서 무엇을 얼마나 썼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문득 아침에 일어나서 든 생각이 ‘아, 밤에 옥상에 올라가 쏟아지는 별들을 봤어야 했는데 까먹었구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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