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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Aug 09. 2022

바다가 갈라지는 중리해안

  - 무위사에서 구례까지, 2017



  미황사를 내려와 인터넷에서 예약해둔 게스트 하우스를 찾았다. 주인에게 '중리 해안'을 물었더니, 지금 쯤 물때일 거라고, 여기서 5분 정도 걸리니까 어두워지기 전까지 충분히 볼 시간이 될 거라고 했다. 이런 횡재가!


  좀 늦은 시간이라 기대했던 장면을 못 보게 되더라도, 또 내일이 있으니까 일단 가봐야지, 운 좋으면 일몰 때여서 더 장관일 수도 있겠지 싶었다. 오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곳이었다. 해안 마을에 도착해서 모퉁이를 돌고 보니, 바다 가운데 섬까지 벌써 절반 정도 길이 드러나 있었다.


  길이 물 밖으로 다 드러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궁금했는데, 사진 몇 장 찍고 보니 섬까지 가는 너른 길이 다 나와 있었다. 마법 같다. 성경에서처럼 몇 초 만에 바다가 쫙 갈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몇 분 걸리지도 않았다. 모세의 기적도 사실은 이런 자연 현상에 기초한 거였을까?














  아름다웠다. 사진은 좀처럼 풍경만큼 아름답지 않은 법인데 사진도 너무 아름다웠다. 주홍빛 일몰이 푸른 바다와 검은 섬을 덮치고 있었다. 바다가 갈라진 길 옆으로 바닷물이 비단자락처럼 스윽 밀려온다.

  그 검푸른 결은 한없이 부드러워 넓은 비단 같기도 하고, 소리 없는 일렁임은 살아있는 짐승의 숨결 같기도 하다. 너무 아름답고도 두려움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바다와 하늘과 섬, 검게 드러난 조가비 길, 현란한 색채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와 인적 없는 바다에 점점 짙어지는 어둠. 짧은 순간에 일어나는 이 놀라운 자연의 퍼포먼스 앞에서 나는 혼자 정신없이 사진을 찍으면서 어쩔 줄을 모른다. 얼어붙은 손과 두껍지 않은 옷을 파고드는 추위와 깊은 어둠에도 난 그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호스텔로 돌아왔다. 종일 과자 부스러기 외에는 먹은 게 없어서 몹시 배가 고팠다. 호스텔 주인이 운영하는 한식당에서 굴 매생이 국을 시켰다. 생선구이 정식도 당겼지만 언 몸을 녹이기엔 매생이 국이 더 나을 것 같았다. 국 한 사발과 밥 한 그릇, 작은 종지에 담긴 반찬들까지 알뜰하게 비우고 도미토리로 돌아왔다.


  이층 침대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 작은 방은, 딱 잠만 잘 곳이었다. 그래서 숙박 객들을 대상으로 오픈되어있는 사무실에 노트북을 들고 내려가서 여행기를 조금 썼다. 가끔씩 주인이 식당과 사무실을 오가다가 열 시쯤 되니, 사무실 문을 닫을 시간이라고 한다. 이만 이천 원이라는 싼 값에 묵는 손님이 주인에게는 달갑지 않았을까 하는 자격지심에 눈치가 보였다.


  도미토리 바닥에 이불을 덥고 앉아 계속 여행기를 썼다. 조금 무섭기도 하고 구조상 샤워를 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으나 방바닥이 따뜻해서 만족스러웠다. 겨울엔 여행객이 적어서 도미토리는 이렇게 텅 비나보다.

내일은 또 어디로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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