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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Aug 08. 2022

무작정 떠나야 할 것 같을 때

  - 무위사에서 구례까지, 2017 겨울


  일본 여행이 무산되고 나서 공중에 붕 떠버린 느낌이다. 사진을 하는 케이와 교토에 가게 되면 많은 사진가들을 만나 새롭고 재미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고, 퇴직을 앞두고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라고 기대했었는데..

  이제 어떻게 하지?


  방학 중 보충수업까지 모두 끝난 후, 집에서 보낸 이삼일은 좋았다. 눈뜨자마자 샤워로 몸과 정신을 깨우고 바로 독서 시작, 중간에 잠깐 글도 쓰고 집안에서 할 수 있는 사진 작업도 했다. 저녁엔 지하 헬스장에 가서 한 시간 정도 운동도 하고. 하루가 금방 갔다.


  분명 보람찬 시간이었고 그것을 충분히 즐겼음에도 왠지 모를 답답함이 느껴졌다. 불과 이삼일 만에. 앞으로 수십 년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데. 안 되겠다. 이대로, 이런 갇힌 느낌으로 살 수는 없다. 여러 가지 해결되지 못한 일들도 장애물처럼 앞에 턱 버티고 있어서 더욱 답답했다.

 

  그러던 참에 일본 여행까지 좌절되어버렸으니 이제 어떻게 하지? 혼자라도 갈까? 그런데 일본은 도대체 나를 끄는 매력이 없다. 홍콩에 갈까? 라오스?

  떠오르는 여행지들, 그 어느 곳도 마땅한 것 같지 않다. 그럼 국내 여행이라도...


  얼마 전에 해선이가 강진에서 일한다고 한 번 놀러 오라고 했었는데. 순간 머리가 핑핑 돌아가며 순식간에 여행 일정이 짜진다. 강진에서 친구를 만나고 해남 땅끝으로 가면, 바다가 갈라진다는 중리 해안이 있다. 그리고 해남 대흥사에서 2박 3일 동안 템플 스테이를 하는 거다. 템플 스테이는 오래전부터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는 보성에 들렀다가 구례로 간다. 구례에서 언니랑 지리산 둘레 길도 돌아보고, 온천도 하고.

마지막엔 임실로 넘어가서 케이를 만난다. 일주일간의 전라도 여행 일정표가 쫙 나온다.


  내친김에 해선이에게 문자로, ‘강진에 가면 너 있냐?’고 물었더니, 직원들은 거기 있는데 저는 들쭉날쭉이란다.

  '아 놔! 친구도 만나고 여행도 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컨셉인데.'라고 문자를 보냈는데 답이 없다.


  갑자기 여행 계획이 민들레 홀씨처럼 흩어져 버린다. 그래, 혼자 여행을 가기로 했으면 그냥 혼자 하는 거지, 이렇게 누군가에 기대어 가려고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케이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그런 핑계도 없이 그냥 혼자 나서기에는 이 추운 겨울에 여자 혼자 방랑하는 것이, 참 동기도 빈약하고 남들 보기에도 그렇다. 외국여행이라면 또 얘기가 다르겠지만.


  다시 생각해본다. 일본, 홍콩, 라오스...

  어느 것도 나를 확 끌어당기는 것이 없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다가 갑자기 무엇에 마음이 동했을까? 다시 전라도 여행 계획으로 돌아왔다. 그래, 일정에서 해선이만 제치면 되지. 나머진 안 될 게 뭐 있나? 어쨌든 이 계획도 뜻대로 안 되면 템플 스테이라도 하는 거지. 이렇게 마음먹으니까 쉬워진다.


  애들에게도 공표하고 여름이 치과 스케줄도 미루고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갑자기 어깨가 쭉 펴지고 이런 내가 대견하다. 정우에게 말했더니 좋은 생각인 것 같다고, 언제 가느냐고 한다. 내일 아침이라고 했더니 깜짝 놀란다. 너무 빠르다고. 순간 내 어깨가 더욱 당당하게 펴진다. 그는 몇 시에 출발하느냐고, 가기 전에 할 수 있으면 만나서 커피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차를 갖고 간다고 생각하니 참 마음이 느긋하고 편하다. 우선 짐을 챙기는데 제한이 없다. 새벽 한 시까지 정우랑 문자로 얘기하며 짐을 꾸렸다.


   아침에 정우에게서 연락이 왔다. 늘 가던 동네 카페에서 만나자고, 더 자고 싶었는데 계속 내 생각이 났다고. 그는 이제야 긴 겨울 패딩 코트를 찾아내서 입고 말끔히 면도까지 하고 나왔다. 말간 얼굴에 미세한 표정의 움직임들이 어쩐지 아이처럼 애잔하다. 진한 커피 향에 애틋한 눈빛과 미소가 뒤엉킨다. 여행의 좋은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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