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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Oct 18. 2023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

  -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에 대한 욕망

    

   중년에 이른 이들에게 다시 십 대나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젊음의 그 혼돈과 불안의 시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거기에 이렇게 덧붙인다. ‘지금 가진 모든 것에 몸만 젊어질 수 있다면 좋겠지.’      


  그러나 그것은 공정하지 않다. 가진 것 없이 젊고 불안하기만 한 젊은이들이 모든 것을 가진 데다 몸까지 젊은 중장년과 어떻게 경쟁하란 말인가? 그래서 신은 공평하게 양측에 한 가지씩만을 내준 것이다. 간혹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진 젊음도 있다. 그들은 화려했던 젊은 시절을 떠나보내기가 더욱 어려울 것이다.    

  

  이 영화(원제 : Clouds of Sils Maria)는 데뷔작, ‘말로야 스네이크(Maloya Snake)’에서 시그리드 역을 맡으면서 젊음의 아이콘이 되었던 배우, 마리아 앤더슨(줄리엣 비노쉬 분)이 세월이 흘러 중견 배우가 된 어느 날에서 시작된다, 동일한 작품이 리메이크되면서 마리아는 데뷔 당시 상대역이었던 중년의 배우 역할을 요청받게 되고, 관객은 그 과정에서 마리아가 겪게 되는 갈등과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말로야 스네이크'는 골짜기를 휘감고 도는 거대하고 하얀 구름 띠가 기다란 뱀의 형상 같다고 해서 이름 지어진 자연 현상으로 악천후에 대한 전조 같은 것이라고 한다. 영화에서는 이 하얀 구름 띠가 파헬벨의 캐논 D장조를 배경으로 느리고 장엄하게 흐르는데 이 장면은 매우 강렬하고 인상적이어서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 다음영화 (daum.net)에서 이미지 차용



  극 중 시그리드는 19살의 활력과 자신감, 오만함 등 청춘의 집합체라 할 수 있는 캐릭터로, 당시 40세의 사업가인 헬레나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는 헬레나로부터 자신의 야심, 즉 성공한 커리어만을 취하고는 결국 헬레나를 버리고 만다. 반면 시그리드와의 사랑에 모든 것을 던졌던 헬레나는 시그리드의 차가운 변심에 한없이 절망한 나머지 어느 날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다.     


  ‘말로야 스네이크’를 리메이크해서 무대에 올리려는 새로운 감독은 20년 전, 시그리드로서 그 존재감을 각인시켰던 마리아를 이제 시그리드가 아닌 상대역, 헬레나로 캐스팅하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빛나는 젊은 시절을 상징하는 시그리드 역에 무한 애정을 갖고 있던 마리아는 중년이 된 지금도 자신을 시그리드와 동일 시 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는 당시 젊은 시그리드와의 사랑에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던 무력하고 보잘것없던 헬레나 역을 수락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당시 헬레나 역을 맡았던 중년의 여배우가 젊은 자신의 눈에 얼마나 따분하고 한심하게 여겨졌는지를, 그리고 결국 그 여배우가 극 중 헬레나처럼 하찮은 자신의 삶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하고 말았던 것을 떠올리며 배역을 수락한 후에도 마음속으로는 그 배역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여전히 유명 배우로서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그 옛날 헬레나처럼, 나이 들어 관습과 틀에 갇히게 되고 주역이 아닌 조역으로 밀려나고 있는 현재의 자신, 남편과는 이혼 소송 중이며 더 이상 남성들에게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자신의 현실이 헬레나라는 배역과 뒤섞이면서 그녀는 고통스러워한다. 



                         이미지 출처 :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 다음영화 (daum.net)



  그녀는 헬레나에게서 나이 든 현재의 자기를 보게 되는 것이다. 대본 연습 중에도 그녀는 극 중 헬레나를 배역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현실의 자아와 혼동하며 자신이 이제 그 헬레나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너무 싫어서 비명을 지르며 울음까지 터뜨린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시그리드 역의 젊은 배우, 조안(클레이 모레츠 분)과 자신의 매니저, 발렌틴의 젊음을 부러워하고 질투하기도 한다.     

 

  마리아의 시각으로 바라본 헬레나처럼, 누군가 주변에 그런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다면, 우리도 마리아가 헬레나에게 느끼는 것과 비슷한 혐오의 감정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물들기라도 할 것처럼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리아의 마음도 이해는 된다.   

  

  마리아의 매니저, 발렌틴(크리스 스튜어트 분)은 마리아에게 다른 각도에서 배역을 해석해 보도록 제안한다. 시그리드는 젊다는 것뿐, 아무것도 모르고 폭력적이라고, 하지만 헬레나는 성숙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고, 헬레나에 대한 관점을 바꿔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마리아에겐 헬레나의 성숙함과 따뜻함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헬레나에 관한 한, 20년 전에 느꼈던 그 나약함과 진부 함이라는 프레임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이미지 출처 :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 다음영화 (daum.net)


   이런 마리아를 보면서 관객은 답답함을 느낀다. 마리아의 심적 갈등을 이해는 하지만 그 변화하지 못하는 경직성에 대해 안타깝기만 하다. 관객은 발렌틴의 견해가 옳다고, 마리아가 그것을 자각하여 헬레나를 새롭고 훌륭한 캐릭터로 재 탄생시켜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마리아에게 외치고 싶어진다.      


  발렌틴은 이렇게 마리아를 설득한다. 글이란 물과 같아서 보는 방향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다고, 20년 전에 시그리드의 눈으로 바라보던 헬레나와 현재 마리아의 눈으로 바라보는 헬레나는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20년 전에 시그리드를 연기할 때는 순수한 마음으로 시그리드를 받아들이지 않았느냐고. 그때의 순수로 돌아갈 수 없겠느냐고. 헬레나라는 캐릭터를 편견 없이 순수하게 바라보라고. 젊음의 특권에만 집착하지 말고 젊었을 때의 그 순수함과 자발성을 되찾아보라고.     


  그러나 마리아는 매번 그러지 못하고 자기 안의 갈등을 오히려 발렌틴에게 폭발시킨다. 관습에 얽매여 진부해지고 나약해진 것은 극 중의 헬레나가 아니라 이제 현실의 마리아 자신인 것이다. 

  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삶의 양태나 그 방향이 참 명료하다. 그러나 당사자로서의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 채 답답하게 그 언저리만 맴돌곤 한다.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얼마든지 열고 나설 수 있는 문이 저기 있는데도, 낡은 틀(convention)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 삶의 클리셰에 갇히곤 하는 것이다.   

   

  글도, 삶도, 그 안에서 우리가 맡은 배역도 유연해야 한다. 스스로 확고하다고 믿는 자기에 대한 규정이 다 옳은 것은 아니며, 다 내세울만한 자기 정체성도 아니다. ‘난 원래 그래, 그게 나야’라고 외치는 것도 결국 고착화된 틀일 수 있다. 나이 들어가면서 우리는 어디까지 유연해질 수 있을까? 가진 것은 적지만 그 자체로 너무 아름답고 자신 넘치는 젊음에 대한 동경, 그러나 지금의 나는 가질 수 없는, 그로 인해 한없이 쓸쓸해지는 마음. 관대함 대신 편협함이 자리를 넓혀가는 나이 들어감의 서글픔.     


  그러나 갖지 못한 것에만 집착하면 우리에게 따로 누릴만한 삶이란 없다. 각각의 시기에 자신이 가진 것을 최대의 장점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활용하고 누리면서 사는 것이 사는 내내 행복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아닐까. 


  마리아는 결국 헬레나 역을 실제로 연기하면서도 주인공인 시그리드 역의 조안에게 부탁한다. 마지막 장면에 조안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 버리는 장면에서 잠시 한 번만 멈춰서 달라고. 그렇게 하면 남아있는 헬레나에 대해서도 여운이 남지 않겠느냐고.

  마리아는 여전히 자신이 맡은 헬레나가 조역이라는 것을 쿨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맡은 헬레나에 주역의 존재감을 불어넣고 싶은 미련이 있는 것이다.     


  조안은 마리아에게 잘라 말한다.

  “아니요, 그 상황에서 누가 헬레나 따위를 신경 써요?”

  제 아무리 마리아가 헬레나를 새롭게 해석하여 훌륭하게 연기했다 하더라도 헬레나가 조역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영화제에서 상을 줄 때 연기가 훌륭했다고 해서 조연에게 주연상을 줄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그래도 끝까지 그 구분을 혼동하는 마리아를 보면서 나이 든 우리 모두의 초상을 보는 듯하다.     


  이미 자신의 역할에 대해 정리가 끝난 상태로 연기에 임한다고 생각했었던 마리아는 조안의 냉정한 반응에 다시 정신이 든다. 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마음 한구석에 여전히 한 자락 미련이 남아있었음을 자각하고 마리아는 의미 있는 미소를 짓는다. 이제 그녀는 비로소 헬레나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게 된 것 같다.    



                         이미지 출처 :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 다음영화 (daum.net)


  마리아에게 헬레나 역을 맡아달라고 청하며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헬레나와 시그리드는 정 반대 인물이 아니에요. 그들은 동일한 두 인물이지요.... 우리는 과거를 다루는 대신 우리의 미래를 예상해 보는 거예요.... 이건 시그리드가 20년 후 헬레나가 되는 이야기예요”     


  내가 시그리드이냐 헬레나이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시그리드와 헬레나는 각 세대의 일반적 캐릭터일 뿐이다. 시그리드가 나이 들면서 대체로 헬레나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그 헬레나를 혐오하고 그 역할을 맡고 싶지 않은 것은 나이 든 자신을 긍정하고 수용하지 못하는 것, 지금은 갖고 있지 않은 지나간 나의 젊음에 대한 집착일 뿐이다.      


  헬레나가 된다고 해서 내 안의 시그리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시그리드와 헬레나, 두 역할을 연기하는 마리아가 한 사람인 것처럼 시간의 흐름에 앞에서 우리 모두는 내 안의 시그리드와 헬레나를 마주할 것이다. 지나간 젊음에 집착하지 않고, 현재의 위치에서 과거를 바라보고 변화해 온 나를 격려하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나를 받아들이는 방법이 아닐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와 다르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를 것이다. 어제의 나만을 기억하고 그것을 놓아 보내지 않으면 오늘의 나를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어제의 내가 아무리 찬란했을지라도 떠나보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변화의 흐름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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