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런데 귀인이 말썽
오후 5시 50분에 캘거리 공항에 도착했다. 휑한 공항에서 우버를 이용해볼까 하다 실패하고 택시를 탔다. 조금 외진 주택가의 민박이었는데 조용하고 룸을 혼자 쓸 수 있으니 좋았다. 전화로만 통화한 중국인 오너는 민박 3채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어서, 영어가 서툰 중국인 남자가 관리인처럼 대기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내일 캔모어 행 버스표를 예매하려면 터미널에 가야 했다. 200미터 정도 걸어서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고 터미널에 도착했는데, 내 앞의 여자 둘이 매표원과 긴 얘기를 주고받으며 깔깔거린다.
날은 어두워지고 지하철에서 내리면 외진 길을 혼자 걸어가야 하는데 마음만 급할 뿐이었다. 창구에서 물러날 줄 모르는 그 여자들에게 속으로 욕을 해주었다.
아침 일찍 출발할 버스표를 원했지만 저녁 6시 30분에 출발하는 것 밖에 없었다. 표를 끊고 문밖을 나서려는데 어둑한 하늘에 비가 철철 내리고 있었다. 저 빗속을 뛰어서 전철역까지 가야 하는데 어쩌나. 그걸로 끝이 아니다. 전철을 한 번 갈아탄 후 또 걸어야 한다.
오늘 저녁과 내일 아침에 먹을 것도 없고 마땅히 살만한 곳도 없는데. 택시를 타야 하나 한참 망설이다 비가 좀 잦아드는 것 같아서 후드를 뒤집어쓰고 냅다 달렸다.
텅 빈 전철 플랫폼이 스산하고 무서웠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려 하는데 몸이 마른 흑인 한 명이 에스컬레이터를 거꾸로 거슬러 내려오고 있었다. 더 무서워졌다. 내가 망설이는데 그가 다시 올라가더니 계단으로 내려왔다.
머뭇거리던 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는데 그가 다시 올라오고 있었다. 이곳 플랫폼에는 아무도 없고 그와 나 둘 뿐인데, 그의 행동이 영 수상쩍다. 방향이 맞는가도 확신이 안 서던 참이라 얼른 다시 내려와서 맞은편 플랫폼으로 올라갔다.
그곳으로 한 커플이 올라오면서 큰소리로 싸우고 있었다. 싸우면서라도 있어주면 좋겠는데 그들은 싸우면서 다시 내려 가버린다.
‘저쪽인가?’ 난 다시 내려와 반대쪽으로 올라갔다. 다시 그 흑인이 보였다. 다행히 정장 차림의 백인 남자도 한 명 보였다. 흑인은 유리문 안쪽 플랫폼에, 그리고 다른 남자는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있었다. 아무래도 이쪽 남자가 더 안전할 것 같아, 나도 들어가지 않고 밖에 서있었다.
난 내가 갈 기차역의 이름을 대며 이쪽 방향이 맞는 거냐고 그에게 물었다. 그가 ‘맞다’고 했고 그때 기차가 들어와서 난 그가 탄 칸에 함께 탔다.
기차 안에도 사람은 별로 없었다. 겁이 나서 난 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여긴 좀 무섭네요.”
내가 이렇게 말하며 웃었지만 그는 별 말이 없었다.
두 정거장 후에 내려서 일단 뭔가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상점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어두웠고 여전히 비가 좀 내리고 있었다. 마트에서 바나나, 요구르트, 전자레인지 조리용 파스타를 사서 전철역까지 뛰었다. 무서워서 뛰었다. 어둠과 비도 그랬지만 허름한 차림의 행인들이 더 무서웠다.
전철역에 도착했을 때 한 남자가 한국어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전화 끊기를 기다리다 통화가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도중에 말을 걸었다.
“여기 사세요, 아니면 여행자인가요?”
“아, 여기 삽니다.” 그러더니 그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내가 벤프 레일 가려면 이쪽에서 타는 것이 맞는가 묻고서, 사정 얘기를 하며 무섭다고 했더니, 그러면 자기가 벤프 레일까지 함께 가서 보고, 걸어가는 길이 위험해 보이면 함께 호스텔까지 걸어가 주겠다고 했다.
자기도 처음 여기에 왔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구세주가 따로 없었다.
전철에서 내려 그가 민박집까지 데려다주었는데, 내가 별 계획이나 정보도 없이 여기에 온 걸 듣고 기가 막혀했다. 그는 민박집 부엌 식탁에 앉아 대략의 일정을 짜주면서, 자기가 내일모레까지는 쉬니까 차로 캔모어까지 데려다줄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재스퍼에 머무는 삼일 동안은 자기도 시간이 안 된다고, 여행 좋아하는 형이 있는데 함께 가줄 수 있는지 물어보겠다며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를 통해 상대편의 이야기 소리가 다 들렸다.
전화 속의 그 형은 일단 시간이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몇 살인지 물어보고 53세라고 하니까 ‘웬 아줌마가 대책도 없이... ’ 하면서 탐탁지 않아했다.
난 속으로 ‘그래. 53세 아줌마를 상상했다가 나를 보면 아차 싶을 거다’라고 혼자 말을 했다.
이래저래 고민을 하던 그가 자기도 여행하는 셈 치고 내일 아침에 데리러 오겠다며, 오늘은 늦었으니 전철 끊기기 전에 가야겠다며 일어났다. 차가 없으면 돌아보기 힘든 이 로키 구간에서 이런 귀인을 만나다니 횡재한 기분이었다.
그의 이름은 경호였다. 나는 내일 밴프에 숙소를 잡지 못한 탓에 중간 지점인 캔모어에, 거기도 숙소가 모두 차버려서 23만 원이나 주고 호텔을 예약했던 참이다. 그것도 딱 하루 있다가 밴프로 떠나야 하는데, 저녁 9시에나 도착해서 잠만 자고 구경도 못하고 가면 어쩌나 하던 참이었다.
게다가 내일은 캘거리에서 할 일도 없이 버스가 출발하는 6시 30분까지 시간을 때워야 할 판이었다. 이 모든 것이 한방에 해결된 것이다.
옆방에 중국인 젊은 여행객들이 들어와 소란스러웠다. 밤에 시끄러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들은 씻고 바로 잠이 들었는지 조용했다.
새벽 두 시쯤에 잠들었는데 요란한 천둥소리에 깨어보니 다섯 시 반이었다. 귀마개를 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 9시쯤에 경호가 왔다. 터덕거리며 끌고 걸어야 했을 캐리어와 가방은 그의 차에 싣고, 산뜻하고 우아하게 그의 차에 올랐다. 그렇게 탁 트인 길을 달리니, ‘아!, 멋진 여행이다!’
그도 말이 많았지만 나는 줄곧 얘기를 했다. 여행 이야기며 사는 이야기들을. 창밖 풍경은 신기하고 아름다웠다. 우리가 향하는 곳은 ‘레이크 루이스’였다.
차에서 내려 갑작스레 마주한 레이크 루이스는 ‘아!’하는 탄성만 나올 뿐, 말을 잃게 했다. 정말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곳이었다. 관광객들이 와글와글 많았음에도 호수는 그 신비스럽고 우아한 자태를 도도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냥 호수겠지, 명소라고 하는 곳이 다 그렇듯이 가보면 별 것 아니겠지 생각했었다. 그러나 레이크 루이스는 시각적 충격이었다.
산자락 아래 드넓은 호수는 형언할 수 없는 에메랄드 빛이었다. 그 위로 빨간색 보트들이 조그맣게 떠다니고 있었다. 호수 옆에는 벌집 모양을 닮아서 그 이름을 따왔다는 비하이브(Beehive) 산이 신기한 모습으로 서있다.
경호는 루이스 호수도 좋지만, 조금 더 올라가면 아그네스 호수가 있는데 자기는 그곳이 더 호젓하고 좋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거기까지 가보고 더 갈 수 있으면 그곳 산 정상까지 가보기로 했다.
산에 오르는 내내, 숨이 차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왜 그랬을까? 어색하지 않으려고? 여행자를 만나면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에 익숙해져서? 더구나 한국말로 하니 말이 더 잘 풀려서? 셋 다인지 모른다.
정면에서 본 아그네스 호수는 그의 말대로 작지만 더 호젓한 분위기였다. 아그네스 호수와 그 옆의 산 정상까지 가는 길은 참 예뻤다. 호수를 여러 방향과 높이에서, 또 여러 가지 전경들 사이로 볼 수 있었는데 제각각의 매력이 있었다.
관광객들이 바글거리던 루이스 호수 앞만 바라보다 갔으면 어쩔 뻔했나? 그렇게 우리는 산 정상까지 올라갔고 그곳에서 내려다본 루이스 호수는 딱 정지한 세상 같았다.
에메랄드 빛 호수는 얼어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고 작은 점처럼 그 위를 떠다니는 보트들도 비현실적이었다. 태어나서 가본 곳 중에 가장 아름다운 곳이었다. 지금도 그때의 감동이 눈에 선하다.
경호는 내 사진을 멋지게 찍어주었고, 우리는 함께 셀카도 한 장 찍었다. 경호는 산에 오르는 내내 나를 돕겠다고 내게 손을 내밀었지만, 매번 나는 못 본 척했다. 손잡고 가자고 해도 그냥 혼자가 편하다고 했다. 그는 이 여행이 정말 자기에겐 선물 같다고 했다.
길에서 뜬금없이 무서움에 떠는 동포 여자를 위해 돕겠다고 지하철을 함께 탔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진짜 도움을 주는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내가 펑퍼짐한 53세의 아줌마로 보였어도, 그가 이 여행에 나를 따라나섰을까?
하지만 그의 설레는 기분과 내게 호의를 베푼 동포라는 내 생각 사이의 갭은 한참이나 멀었다. 그래서 내가 못 본척해도 계속 손을 내밀며, 몇 번씩이나 선물 같다고 말하는 그에게 공감할 수가 없었고 조금은 거북했다. 그러나 어쨌든 난 그의 호의를 편의로 누리고 있었다.
그렇게 산을 내려올 때까지가 딱 좋았다. 그 후에 캔모어로 나를 데려다주고 그가 캘거리로 돌아갔더라면 딱 좋았을 것이다. 다른 숙소를 구할 수도 없는 그는 트윈 배드인 내 호텔룸에서 묵게 되었다.
난 우리가 그다음 날의 벤프 여행을 오늘처럼 하리라 기대했고, 그는 그날 밤을 나와는 다른 기대를 품고 기다렸던 것 같다. 따로 숙박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그가 저녁을 사고 작은 와인을 한 병 샀다.
캐나다에서만 나오는 아이스 와인이라고 했다. 겨울철에 수확한 흰 포도로 만든 달콤한 와인이라고 했다. 정말 늘씬하고 작은 병이어서 종이컵에 따르면 겨우 두 잔이 나왔다.
나는 좀 자유로이 욕실을 쓰고 싶다고 잠시 나가 있어 달라고 했다. 그는 전화도 하고 담배도 피우고 오겠다고 했다. 그가 방을 비운 사이 나는 내 침대를 벽 쪽으로 바짝 붙였다. 그가 돌아왔을 때, 내가 그의 침대도 반대 편 벽 쪽으로 밀려고 하자 그는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간격이 더 멀어진 것 같지는 않았다. 난 어색해지지 않으려고, 또 쐐기를 박는 차원에서 그가 보는 앞에서 정우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경호와 함께 셀카까지 찍어서 보냈다. 내가 경호랑 함께 있다고 말하고, 함께 있는 사진을 보내고 하는 것은 경호더러 보라고, 그래서 딴생각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경호랑은 가족 얘기, 연애 얘기 등 온갖 얘기를 다했다. 그는 내숭 떨거나 감추는 성격이 못되어서 거르는 것 없이 다 얘기했다.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이제 그만 자기로 하고 누웠다. 한참 후, 경호가 자기는 참느라고 힘들다고 했다.
이렇게 매력적인 여자를 옆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아침에 일어나면 자기가 정말 바보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손만 잡고 자자고 온갖 감언이설로 꾀었지만 난 단호하게 안 된다고 했다.
그가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냅다 제 침대를 내 침대 옆으로 밀어붙이길래 저리 가라며 발로 침대를 밀어버렸다. 그가 한 번만 안아보자고 해서, 나는 “내일”하고 단호하게 끊었다.
눈곱만큼도 그럴 생각이 없는 나는 그저 이 상황과 아이처럼 조르는 그가 괴로울 뿐이었다. 말을 잘 듣는 것 같으면서도 집요한 데가 있다.
그러다 나는 설풋 잠이 들었고 그가 자꾸 내게 다가오려고 해서 결국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직 새벽이지만 일어나 움직여도 될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서면서도 간밤에 못 잔 잠 때문에 정신이 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