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글리시 베이의 노을

- 캐나다, 밴쿠버

by Annie


아침에 세탁을 하려고 미리 사둔 론드리 카드를 찾지 못해서 세탁도 못하고 5달러만 날렸다. 짐은 호텔에 맡겨둔 채 이곳 학생 회관에 와서 글을 쓴다. 미리엄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정하고 케어를 많이 해주지만 가끔 너무 세세한 것까지 오래 이야기를 하는 바람에 듣다가 지칠 때도 있다.


이곳에서 2시간 정도 머물다 다운타운의 호스텔에 체크인하고, 오후에는 잉글리시 베이에 가서 선셋을 보고, 밤 10시에 스탠리 파크에서 퍼포먼스가 있다 하니 가볼까 한다. 그러나 티켓 값이 비쌀 것이다.

체크아웃을 하고 학생회관 근처 벤치에 앉아 커피와 어제 사서 먹다 남은 쿠키를 먹으며 계속 글을 썼다. 내가 앉은 기다란 벤치 옆의 길고 넓은 데크 위에서 한 청년이 롤러 블레이드를 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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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안에 앉아 있으니 기분이 좋다. 내가 학생이 된 것 같은 느낌도 있고 자유롭고 넓고.


시내로 돌아와 호스텔에 체크인하고 안내받은 룸에 들어갔더니 곧 두 명의 남자가 방으로 들어왔다. 순간 후회가 되었다. 여자 전용 룸으로 할 걸. 둘이 친구여서 어쩐지 편치 않았다. 각기 홀로 여행 족이면 말 붙이기도 쉬운데 커플이나 친구끼리 오면, 어쩐지 나 혼자 방해되는 존재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조금 꾸무럭거리며 지도를 연구하다, 잉글리시 베이 비치로 방향을 잡고 출발했다. 그제 카필라노 탐험할 때 집결지였던 하이 밴쿠버 다운타운 호스텔과 가까운 곳이라 어렵지 않게 찾았다.

다 좋은데 깔고 앉을 타월을 갖고 왔어야 했다. 짐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생각에 골몰한 나머지 필요한 것도 챙기지 못했다. 항구나 해변의 모습도 좋지만, 등성이진 풀밭 여기저기에 점처럼 그림처럼 흩어진 채, 누워있거나 앉아있는 사람들이 전경을 이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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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을 피해 일몰을 보려고 계속 자리를 옮기면서, 문득 내가 왜 썬셋에 목매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여행이 지루해졌다. 배고픔을 때우기 위해 부피가 큰 오레오 쿠키를 사게 된 상황도 마음에 안 들었다. 피자나 뭔가 음식을 먹고 싶었는데,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기 굽는 노린내가 자꾸 마리화나 냄새를 상기시켜서 싫다. 사람들이 왜 여기서 고기를 구워 먹는 거지? 아무튼 썬셋이라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곳에 3시간 정도 머문 것 같다. 미친 짓이었지만 뭔가 있겠지 하는 기대를 접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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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 보람이 있어서, 아름다운 노을을 볼 수 있었다. 덕분에 콧물과 재채기가 쏟아지는 비염 증상을 얻어오긴 했다.

어제 UBC 근처 해변에서 마리화나 냄새를 맡은 후로는, 이곳 밴쿠버 곳곳의 공기 안에 그 냄새가 배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알람브라 궁전에서 맡았던 살충제 냄새처럼 줄곧 따라다니며 속을 뒤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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