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나다, 밴쿠버 아일랜드
나나이모 숙소에 도착해서, 리셉션 청년에게 갈만한 곳을 물어 알아두었다. 그러나 식료품 마트와 바로 옆 주류 마트에 들러 식품과 와인 한 병을 사들고 와서는, 호스텔에 그냥 눌러앉았다.
거리는 정말 조용하고 한산했다. 주말이 아니라 관광객이 많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이다. 모처럼 만나게 된 한산한 관광지가 마음에 들었다. 더불어 마음까지 여유로워졌다. 주변에 갈 곳도 있어서 이박을 예약했지만, 하루쯤 더 머물고 싶은 곳이었다.
호스텔 룸메이트들에게 먹을 걸 좀 사 왔으니 함께 먹자고, 생각 있으면 키친으로 오라고 했다. 바나나, 블루베리, 딸기, 브리 치즈와 니코타 치즈, 그리고 재스퍼에서 샀는데 아직도 다 못 먹은 커다란 빵 등을 차려놓고 와인까지 땄다.
잠시 후, 룸메이트 둘이 내려와 합석했다. 몸집이 아주 큰 독일 걸, 카타리나는 와인은 안 마신다고 했다.
“그럼 맥주만 마셔?”
“테킬라만 마셔.”
“오!”
호주에서 온 얼굴이 정말 예쁜 샤니, 그리고 룸메이트는 아니었지만 독일 걸, 마리가 합류했다. 나중에는 잘생긴 남자도 한 명 합석했다. 마리가 그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더니 독일에서 왔다고 했다. 마리가 실망한 듯 말했다.
“또 독일인이야?”
“미안.” 그는 난감해했다.
관광지마다 독일인 여행자들이 넘쳐나서, 그들은 같은 독일인을 만나는 걸 반가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부분의 독일 남자들은 다 잘생겼다.
우린 각자 다녀온 여행지와 앞으로 가게 될 여행지 등에 대해 얘기했다. 카타리나는 한국 여성 여행자들이, 그룹으로 몰려다니며 사진만 찍는다고, 그건 여행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시아 문화에 대해서도 큰 소리로 떠드는 것, 매너 없이 거친 운전 매너 등을 열거하며 매우 부정적으로 말했다. 그녀는 아시아인들에 대한 냉소적 시각과 우월감을 갖고 있었다. 많은 백인들이 그녀와 똑같은 생각이면서도 내색을 안 했던 것인지 순간 의구심이 들었다.
난 카타리나 같은 여자들이 싫다. 거구에 자기중심적이며 자기의 생각에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그것을 남에게 강요하다시피 하는 목소리 큰 아줌마 스타일.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샤니가 마리에게 낼 하이킹을 함께 가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여기서 아침 9시 30분쯤 만나자고 했다.
어쨌든 나는 점점 소외되는 기분을 느꼈다. 내일은 이들 그룹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되겠구나 싶었다.
아침이 되어 샤워하고 방으로 돌아오니, 카타리나는 벌써 없었다. 키친에 갔더니 마리가 나를 웃으며 반겼지만, 어젯밤 소외된 듯한 기분 때문에 그녀에게 가지 않고 창가 테이블에 앉았다. 날이 무척 시원했다.
옆 테이블에 순해 보이는 걸이 있어서 그녀가 얘기 상대로 좋겠다 싶어 말을 걸었다. 알고 보니 그녀는 룸메이트였고, 아침에 눈떴을 때 눈인사를 나누었던 이가 그녀였다.
오늘 일정에 대해 얘기하다가 샤니가 내려와 아침을 준비해서 마리에게 가자, 그녀도 그쪽으로 갔다.
'또 혼자네.'
한참 후에 샤니가 내게 와서 자기들은 오늘 하이킹을 갈 건데, 함께 가겠느냐고 물었다. 난 섬에 가려고 했는데.
하이킹이 좀 힘든 코스 아니냐고 회의적으로 물었더니 다들 힘들지 않다고, 택시로 입구까지 가서 호수를 보고 정상에서 나나이모 뷰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오케이 했고 갑자기 하루를 함께 할 동행이 생겨 신이 났다.
그러나 하이킹은 그들이 생각한 만큼 쉽지 않았다. 정작 하이킹에 능해 보였던 마리와 샤니는 한참 뒤처져서 잘 따라오지 못했다. 마리는 헉헉댔고, 샤니는 어려서 운동선수였지만 다친 후로 무릎이 안 좋아졌다고 했다. 그녀는 겨우겨우 따라오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시작도 안 했을 거라고 했다.
오르는 데만 2시간이 걸렸다. 그 두 시간이 내게는 쉬웠다. 나와 보조를 맞추어가던 샬롯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제일 겁내더니 무슨 타고난 하이커처럼 잘 가네.”
그렇게 정상에 오른 우린 360도 탁 트인 전망과 서늘한 공기에 모두 신나 하며, 우리의 성취에 뿌듯해했다.
여기저기서 사진도 많이 찍으며 정상 정복을 즐기던 우리에게, 내려오는 길은 장난이 아니었다. 오르기보다 1.5배는 더 힘들었고 우린 지쳐 있었다.
경사가 험했고 나도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등산화도 아니고 운동화도 아닌, 고무 단화를 신은 나는 발을 내디딜 때마다 온몸의 무게가 발끝으로 쏠려서 무척 힘들었다.
올라오던 사람들도 힘들어하며, 정상이 정말 이렇게 힘들게 올라갈 만한 가치가 있는 거냐고 우리에게 물었다. 그들은 아직 절반도 못 올라왔다.
정상은 멋지다고, 힘내서 가라고 그들을 격려했지만, 그들의 행로가 얼마나 힘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는 그들을 안쓰러워했다.
우리는 힘든 가운데서도, 이 하이킹이 끝나면 수영도 하고 콘서트도 함께 가고 할 일정에 대해 얘기하며 고달픔을 달랬다. 그렇게 힘들게 내려와서 우리가 접어든 곳은 작은 호수였다. 호수라기에는 그냥 물이 고인 연못이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캐나다의 다른 호수들처럼 푸르지도 않고 연갈색 빛을 띠고 있었지만 그래도 바닥에 돌들이 투명하게 보였다.
갓 세 살이나 됐을까 싶은 꽉 깨물고 싶도록 귀여운 꼬마와 아빠, 그리고 개 한 마리가 그곳에서 놀고 있었다.
샤니는 여기서 그냥 수영하자고 했다. 난 호스텔에 들를 줄 알고 수영복도 안 가져왔는데. 마리도 수영복은 없었지만 그냥 하자고 했다. 아이 아빠에게 여기서 수영도 할 수 있느냐고 묻자 그는 아마 그럴 거라고, 개들이 수영하는 것은 봤어도 사람이 수영하는 것은 보지 못했지만, 뭐 해도 괜찮을 거라고 했다.
난 물 색깔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안 내켰지만, 모두들 물속에 들어가서 내게 손짓하는 통에 나도 겉옷을 벗고 입고있던 검정 언더웨어 세트를 수영복인 셈 치고 물에 들어갔다.
그런데 물이 깊어서 셋은 물 위에 서있는 것처럼 뜬 채로, 발로는 물아래서 계속 수영을 하고 있었다.
‘난 저렇게 수영 못하는데.’
잘못했다가 내가 위험을 느껴 나를 도울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게 되면 어쩌나 머뭇거렸더니, 그냥 가에서 몸만 담그라고 했다.
그녀들은 야생의 호수에 뜬 선녀들 같았다. 그때 그들을 사진으로 찍었어야 했다. 난 얕은 곳에서 두어 번 머리를 물에 박고 수영을 했다. 모두들 잘했다고 격려해주었고, 샤니는 기다란 막대기 두 개를 갖고 와서 내게 거기 매달려 보라고 했다. 모두들 고마웠다.
그렇게 수영을 즐기고 난 우리는 기분이 상쾌해졌고, 꼬마는 우리에게 자기의 돌 던지기 실력을 뽐냈다. 그의 이름은 제임스였다. 어쩐지 아이에게 안 어울리는 어른 이름 같았다. 제이미라고 불러야 맞지 않을까?
제임스 아빠가 제임스에게 이 숙녀들을 주차장까지 안내하라고 하니까, 그는 한껏 용감하게 앞장서서 우리를 인도했다. 많이 다녀 본 솜씨다.
어린 꼬마인데도 벌써 남자임을 뽐내는 것이 남자들은 모두 여자 앞에서 용감해지고 싶은 본능이 있나 보다.
마리가 남은 쌀과 재료가 좀 있다고 저녁에 요리해 먹자고 했다. 콘서트는 저녁을 먹고 가자고. 그래서 샤니와 샬롯은 콘서트 티켓을 알아보러 가고, 마리와 나는 요리에 필요한 재료와 화이트 와인 두 병을 샀다.
주류 매장에서 와인을 골라 계산하려고 계산대 앞에 서있으니까 계산원이 마리에게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마리가 신분증을 보여주고 나니, 내게도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둘이 함께 사는 거라고 했더니 그러면 나는 저쪽으로 비켜나 있으라고 했다.
와인을 사들고 나오면서 마리는 어이없어했다.
“알코올을 살 때 신분증을 요구하는 것은 미성년인지 확인하기 위한 거잖아. 내 나이 27인데...”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럼 나는 뭐냐? 난 오십이 넘었는데...'
호스텔에 돌아와 마리와 샬롯은 요리를 하고, 나와 샤니는 먼저 샤워를 하기로 했다. 샤워하고 나오니까 와인색 드레스를 입고 열심히 화장을 하고 있던 샤니가 30분 안에 콘서트 보러 나서야 한다며 서두르라고 했다.
급히 준비하고 식당에 가서 요리된 카레와 와인을 한 잔씩 했다. 카레도 너무 맛있었고 마리가 고른 화이트 와인도 훌륭했다. 설거지는 내가 자청했다. 훌륭한 요리를 해준 마리와 샬롯을 위해.
난 선크림도 못 발랐는데 셋은 화장까지 마치고, 샤니와 샬롯은 멋지게 차려입기까지 했다. 샤니도 샬롯도 화장 안 한 얼굴이 훨씬 더 예쁘기는 했지만, 화장하고 차려입으니 확실히 핫해 보이긴 했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기도 하고.
콘서트를 보려면 5분 정도 페리를 타야 했다. 이 모든 것이 너무 신기하고 신났다. 바다 위엔 노을이 말 그대로 불타고 있었다.
콘서트 자체는 어쿠스틱이어서 별로였지만, 그래도 바다를 건너와서 바다를 코앞에 두고 앉아있으니, 마치 선상 바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가벼운 술과 스낵을 즐기며 온갖 이야기꽃을 피웠다. 십 대들처럼 남자 이야기도 돌아가며 하고.
콘서트에서 돌아와서는 마리가 하루를 묵었던 호스텔의 바에 모두 춤추러 갔다. 호스텔 바라기에는 너무 컸고 사람들도 많아서, 보통 바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한참 가라오케가 열리고 있었다. 우린 한 잔씩 주문을 한 후에 춤도 추고 노래도 신청했다.
나를 뺀 셋은 모두 차례로 한 번씩 무대에 올라가 신청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우린 소리 지르며 응원하고 신나게 춤을 추다 돌아와, 남은 와인 한 병을 식당에서 마저 마셨다. 우린 오늘 하루가 너무 재미있었다며 행복해했다.
샤니와 샬롯이 왕복 택시비를 냈고, 음식 재료비는 내가 냈고, 와인은 내게 레드와인이 있어서 새로 산 화이트 와인은 나를 뺀 나머지 세 명이 나누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그냥 화이트 와인을 나누어 마시면서, 셋 모두에게 10달러씩 주었다. 그들은 그럴 필요 없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난 그러고 싶었다.
내일이면 마리와 샤니는 각자 밴쿠버와 토피노로 떠난다. 샬롯은 이곳에 6일 동안 머물며 스쿠버 다이빙 코스를 익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