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캐나다, 빅토리아
내가 묵던 호스텔은 주말에 빈 침대가 없어서 다른 곳으로 옮겼다. 무거운 캐리어를 끌고 20분쯤 걸었을까. 여행 중에 만난 최악의 호스텔이었다. 작고도 작은 것이 키친은 도저히 그곳에서 뭘 먹고 싶지 않을 만큼 옹색했다. 다행히 작으나마 루프 탑이 있어서, 준비해 간 저녁도 먹고 그곳에서 쉬고 있던 이들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3명이 한 그룹으로 자동차 여행을 하는 친구들이었는데, 차림이며 생김새가 꽤 야성적이었다. 여자는 양쪽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앞뒤로 문신이 가득했다. 남자는 피부가 햇빛에 많이 그을은 데다, 얼굴도 지금껏 보아왔던 섬세한 느낌의 백인 남자들과는 달랐다. 억센듯하면서도 무척 분방한 분위기를 풍겼다. 말로만 듣던 히피란 바로 이들을 두고 부르는 명칭이 아닌가 싶었다.
여자는 남자가 들고 있는 묵직한 초록색 거북이 상을 갖고 싶다고 졸랐다. 내가 그녀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어떤 남자가 자기 문신에 관심을 보이며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해서, “그럼 나 유명해지는 거예요?”라고 물었다며 킥킥거렸다.
그녀는 흔쾌히 포즈를 취해 주었고 난 남자도 함께 찍으라고 했다. 여자는 쿨했고 남자는 보기보다 순박했다. 그녀는 자기 옷자락을 들춰서 옆구리, 배에도 모두 문신이 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이 요가와 명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의외였다. 그녀는 명상에 이를 수 있는 방법과 그 효과에 대해 열심히 설명해주었다. 남자도 명상과 비슷한 호흡의 효과에 대해서 얘기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들이 요가와 명상을 즐긴다는 것은 곧 그들이 진짜 히피라는 반증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남자는 좀 전에 피곤하다고 먼저 들어간 여자와 커플이고, 내일은 40-50킬로미터 정도 거리의 하이킹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10시가 다 되어서야 옥상에서 내려와 샤워하고 나서 휴대폰을 찾는데 없다. 보통 베개 밑에 두기 때문에 거기도 들춰보고 주머니도 살펴봤는데, 분명 옥상에서 사진까지 찍었는데 그 뒤로 기억나지 않는다.
옥상에서 내려올 때 내 이미지를 그려보니 접시와 먹거리를 담은 비닐봉지, 안경만 있을 뿐 그 안에 휴대폰은 안보였다. 옥상 데크 사이에 빈틈들이 있었는데 그 사이로 빠졌을까? 다시 옥상에 가봤지만 어두운 그곳에서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우리 뒤에 남아 있던 일행 중 한 명이 봤을까 물어보려고 문신 걸을 찾았더니, 그녀는 밖에서 통화 중이었다. 내가 사정 얘기를 했더니 내일 아침에 옥상에서 찾는 걸 도와주겠다며 다시 통화로 돌아갔다.
‘뭐라고? 난 내일 아침에 밴쿠버로 돌아간다고!’
급해진 내가 다시 부탁하자, 그녀는 그녀의 휴대폰 불빛으로 데크 사이를 비춰보다가 또 전화 통화에 빠져든다. 룸메이트 한 명이 플래시를 빌려주어 다시 올라가 비춰보았으나 없었다.
아! 휴대폰에 모든 것이 다 있다. 연락처, 예약한 숙소와 차 티켓, 사진, 나눈 대화들...
그 옥상에서 저녁 먹을 때, 아무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한쪽에서 조용히 컴퓨터만 들여다보던 왜소한 몸집의 남자가 뭘 찾느냐고 물었다. 내가 사정 얘기를 했더니, 아이폰은 추적이 가능하다며 자기 컴퓨터로 한 번 추적해보자고 했다.
아이폰에 그런 기능이 있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기계치인 나는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부분이다.
내 아이폰의 비번을 치고 들어가자, 내 정보가 뜨고 그곳 메모 창에서 내 전화번호도 떴다. 그가 전화를 걸어봤지만, 내가 무음으로 해놓았는지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위치 추적에 들어갔다. 이 호스텔 안 1분 거리에 있었다.
'그건 아는데 어디에?'
그가 컴퓨터에서 시그널을 보내자 마치 어디선가 암호음처럼 응답하는 소리가 들린다.
방이었다.
침대였다.
베개를 들어봤는데 여전히 없다. 그런데도 소리는 그 근처에서 나고 있었다. 소리의 근원지를 가만히 들어보니 베개 속이었다. 베갯잇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어떻게 그리로 들어갔지?
아마 샤워하러 가면서 그곳이 안전하다고 생각해서 숨겨두었던 모양인데, 그것을 까맣게 잊고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휴대폰의 위치를 추적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나는 너무 기뻐서 그에게 정말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를 했다.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왔다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잊어버렸다. 너무 고마워서 페이스북 친구라도 삼고 싶은데, 그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
아침에 미리엄에게 그의 폰으로 메시지를 보냈던 사진이 왔다. 거기에 발신자 명으로 그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 다행이다. 페이스북 친구 신청해야지.
그러나 한 편으로 그가 아랍인이라, 혹시 하는 경계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난 그의 컴퓨터에서 사용했던 내 아이튠 비번을 바꿨다.
선의를 베풀고도 이런 의심을 받아야 하는 그도 안됐고, 의심하는 나도 인종차별주의자인 것 같아 죄책감이 느껴졌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 미안해, 그리고 정말 고마웠어."
호스텔 룸이 작으니까 모두들 얘기를 나누게 된다. 몬트리올에서 온 19살짜리 파스칼은 꼬마 같은 얼굴이다. 3개월 동안 밴쿠버 아일랜드에 머물 예정이라고 했다.
여행 중에 만난 젊은이들을 보면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다. 진취적이고 거침없다.
한국에서 워킹 홀리데이로 온 청년도 주방에서 만났다. 6개월 후 이번 과정이 끝나면 미국으로, 호주로 여러 나라를 돌며 여행을 할 거라고 했다.
그의 멋진 여행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