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사유_ 커다란 집 (박혜선 글/이수연 그림)
겨울 냄새는 쓸쓸하다. 조막만한 햇살의 무게도, 금세 양지에서 음지로 변한 담벼락의 모서리도 그렇다. 내게는 모든 것이 안타깝고 가엾게 느껴지는 계절이 겨울이다. 이런 날 무작정 걷다가 열선이 깔린 버스정류장 긴 의자에 앉아 있으면 위로가 된다. 엉덩이에서 시작되는 작은 온기가 볼까지 올라오기에 그런가. 요즘 작은 것에도 감사하자고 했던 다짐에서 나온 발상인가 알 수 없지만 쓸쓸한 날엔 마음이 가난하여 천국이 내 것인 것만 같다.
이런 쓸쓸함이나 무인카페의 쓴 커피 맛, 눈이 녹아가는 도로의 질척함도 좋다. 쓸쓸해서, 안타까워서 좋은 것들이 있다.
작품 속 주인공은 집을 갖고 싶어 현재의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고 열심히 일한다. 친구를 만나거나 바닷가를 거닐거나 책을 읽거나 하는 일은 나중에 해도 된다고 생각하고 돈 버는 일에만 몰두했다. 드디어 그는 작지만 자신의 꿈을 실현할 집을 마련한다.
그의 유일한 행복은 오직 집! 집을 장만한 그는 행복하게 살았을까. 아니, 집을 장만한 당신은 여전히 행복한가? 십중팔구 행복은 잠시, 또 다른 욕망으로 자신을 들볶거나 함께 자는 사람을 볶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행복은 도덕경 첫 장에 나오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처럼 도라고 명하자마자 도는 저만치 앞에 있다는 말과 비슷하지 않을까, 행복이라 이름을 지었더니 행복은 이미 저만치 가고 있는 이 당황스러운 현실을 우린 간혹 경험했을 것이다.
하여, 행복은 반드시 주관적이어야 한다. 또한 비교불가여야 한다. 나의 고유한 것이어야 한다.
애석하게도 집을 위해 질주한 우리 주인공은 친구의 집에 가서 그 화려함과 웅장함, 집안 가득 채워진 세련된 물건들에 흠뻑 기가 죽어 돌아온다. 그리곤 스스로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도 않은 채 더 많은 물건을 집에 들여놓고 더 좋은 집을 사기위해 또 다시 질주한다.
어쩌면 우리는 일생을 집에 있는 화장실 하나씩 늘리기 위해 이토록 열심히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집은 화장실이 하나다. 아이들이 셋이니 학교 다닐 때는 줄을 서야했고 급할 때는 아파트 관리사무소로 뛰어가야 했다. 화장실 두세 개 있는 집에 놀러 갔다 오면 ‘그 집 좋더라’를 연신 남발해서 민망하기도 했다. 사실 그때는 미안한 마음이 많았는데 지금 아이들은 그때의 일을 추억한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별거 아니게 되는구나 하는 신비한 경험을 요즘 한다. 지금도 우리 집 화장실은 하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소박한 결론에 나는 만족한다. 더 원하지 않는 마음, 이것이 행복이고 기쁨이 아닐까.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욕망해서 가지고 있는 것을 망치지 말았으면 좋겠다. 자기기만이나 안주와는 다르다. 욕망하는 것과 가질 수 있는 것 사이의 간격을 좁혀 균형을 잡고 나의 정신 줄도 잡는 것이 결국 나답게 사는 비결이다. 주인공의 깨달음처럼 타인의 욕망을 집으로 끌어들였다 다시 비우기를 실행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은 것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고요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바깥세계와 나의 내면세계, 두 왕국에서 살고 있는 나는 절충과 합의, 그래서 불안의 수위를 낮추고 자신에게 필요한 몇 가지로도 삶은 풍부해 질 수 있다는 것! 이 어려운 일을 주인공은 해낸다.
고대그리스 철학자 에픽테토스(스토아학파)는 노예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서 철학 선생이 되어 그런지 평생 ‘자유와 노예’를 자신의 논의로 삼았다. 그는 ‘자유’란 원칙적으로 인간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정신적 자유’와 자기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해서 만든 정신적 부자유를 ‘노예’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정신적 지위와 태도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사회 통념과 문화의 시류에 대한 프레임 속에서 ‘반드시~한다’는 신념으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많은 걸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적인 ‘노예’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나에게 자유를 주면서 살고 있는지 돌아 볼일이다.
나의 허름한 집에 감사한다. 물론 최신의 크고 평수가 더 넓은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나의 욕망을 내려놓는다. 커다란 집에 갇혀 지금의 만족을 잊어버리고 사는 배은망덕은 하고 싶지 않다. 마음 한 켠에는 아이들 어린 시절을 보낸 다세대주택에서 오종종한 키를 재주던 안방 문기둥이 그립다. 이사 올 때 그 문기둥을 떼어오고 싶었으니까.
지구의 인구 수 만큼 사람 사는 것이 다양하고 다채로울 거 같지만 사실 다 거기서 거기다. 사회와 문화, 전통과 통념, 그리고 사회적인 보편의 틀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의 일상은 오로지 나의 것이기에 충분히 나로 살 수 있다.
쓸쓸한 겨울, 도시외곽 곳곳에 세워지고 있는 커다란 아파트만을 동경하지 말고 (더 쓸쓸해질게 분명하니까) 좋은 영화 한편보고 가까운 친구와 겨울 길 산책을 해보는 것은 어떨까, 아니면 나와 함께 시간 맞춰 따뜻한 버스정류장 의자 데이트라도 하던지. 소소한 즐거움이 당신의 일상에 눈발처럼 휘날리기를 기대한다. 하여, 쓸쓸해도 좋고, 많은 것으로 채워지지 않은 오래된 집도 좋고, 사회 통념적 기준미달의 생도 좋고. 라고 생각할 수 있는 내면의 자유근육이 막 생기기를. 겨울밤, 당신을 비추는 별빛을 올려다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