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ucy Jun 02. 2022

서울 여행기 vs 구례 생활기

구례에 와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역시 '어떻게 갑자기 구례에 오게 되었나요?', 그다음으로 가장 많이 묻는 건 '구례에 연고가 있어요?'다. 나는 구례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 갑자기 살게 된 것이다. 내가 그동안 활동적인 사람이었는지, 조용한 사람이었는지, 재밌는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잘났는지, 못났는지, 어떤 일을 하던 사람인지 여기에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렇다는 것은 어떤 사람도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도 될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 나의 이미지는 서울과 묘하게 달라졌다. 그것은 이번에 2박 3일 동안 서울에 다녀오고 나서야 알게 되었는데, 달라진 나에 대해 발견한 것들은 이런 것이다. 


편의상 서울에서의 나는 '서영', 구례에서의 나는 '구영'이라고 하겠다.  

서영이는 모든 것에 소극적인 편이다. 사람을 사귀는 것에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에도 아니, 소극적이라기보다는 수동적인 편이다. 캠핑도 가고, 예쁜 카페도 가고, 핫플레이스도 가지만 같이 가자고 하는 누군가가 없으면 내내 집에만 있는 집순이다. 높은 성 꼭대기에 나만의 세계를 짓고 그곳에서 잘 움직이지 않는다. 서영을 보던 사람들은 서영이 친절하지만 곁을 잘 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구영은 구례에서 사귄 친구의 표현대로 딱.. 흰색 댕댕이다. 나에게 이런 자아가 있었는지 몰랐다. 오랫동안 떠나 있던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구례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친근하고 귀하다. 누울 자리 보고 발을 뻗는다고 했던가, 구례는 구영에게 얼마든지 발을 뻗어도 되는 곳이라 여겨진다. 구영은 능동적으로 좋은 곳을 찾아다니고, 평소에 하고 싶다 생각만 하고 막상 듣지 않았던 수업들도 꼼꼼히 챙겨 들었다. 넉살 좋게 인사도 잘 건네고 친근하게 안부도 잘 물었다. 집보다 밖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느릿느릿 걸어 다니기도 잘한다. 무엇보다도 내내 영혼과 함께 지낸다. 



서울에 간 첫날은 일요일이었다. 어디보다 핫하다는 한남동 플로티카앞에 나를 내려주고 백군은 시댁으로 갔다. 한 손에는 흰색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고, 초록색 나무가 찍힌 에코백을 어깨에 메고, 다른 한 손에는 전시하는 수현에게 줄 상자를 들고 곧 결혼을 앞둔 은정과 현중, 은정의 언니 은별을 기다리고 있었다. 수현에게 줄 상자에는 마당에서 팟으로 옮겨 심은 상추가 단단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이미 넘치게 받았을 꽃 대신 상추를 주면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괜한 생각이었다고 후회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곳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웃거나, 얘기하거나, 통화를 하거나 모두 빠르게 움직였다. 가만히 서있는 건 나와 어느 가게 앞에 나와있는 큰 화분뿐이었다. 오래되거나 낡은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장식을 위해 나와있는 화초들까지 모두 생생해서 상한 잎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래전에 제주도에서 구입한 천연염색 바지를 입고 망친 히피펌을 하고, 빈손이 없는 채로 그곳에 서있던 나는 구례에 가고 싶었다. 새것과 화려한 것과 빠른 것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서울은 나를 좋아하다 심하게 토라진 친구 같았다. 멀리서 은정이 나를 부르며 뛰어왔다. 숨이 훅~ 쉬어졌다. 


그림그리는 친구 수현의 전시




밤 12시가 넘어서 구례에 도착했다. 빛이 하나도 없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제 됐다 싶었다.  

다음 날 저절로 눈이 떠질 때까지 자고, 깨끗하게 청소를 하고 모닝 페이퍼를 쓰고 오늘의 할 일을 적어보았다. 오늘까지 도서관에 반납해야 하는 책이 있어서 책을 읽고, 마당에 심어놓은 토마토와 가지와 상추와 꽃에 물을 주고 그새 많이 자란 상추를 수확해서 아침을 먹었다. 집 보러 온 제비를 구경하며 한참 앉아있다가 자전거를 타고 '느긋한 쌀빵'에 가서 동네에서 수확한 수박을 가져왔다. 수박은 냉장고에 넣어두고 현미를 먹느라 남아도는 백미를 '월인정원 구례양과자점'에 가져다 드렸더니, 사장님이 쓰신 책을 주셨다. 서울 유명 핫플보다 맛있는 잠봉뵈르도 주셨다. 오는 길에 도서관에 들려 오랫동안 읽지 못한 다른 작가님들의 글을 전부 읽고 글을 쓴다.  


서울에서도 분명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제 다시는 서울에서 살지 못할 것 같지만 앞일은 모르는 일이니까 단정하진 않겠다. 실제로 서울에서의 두 번째 날부터는 완전히 적응해서 잘 지내다가 왔다. 예전엔 새로운 것, 재밌는 것, 특별한 날 같은 것들이 좋았는데 이제 아무 이벤트도 없는 날이 좋다. 매일이 설레는 일상이라서 그런가 보다. 오늘도 별일없이 잘 살았다!


보리수, 보리똥, 뽈똥이라고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골살이 한 달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