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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스리 Jul 29. 2022

방송이 가장 쉬웠어요

제가 한 선택은 맞습니다만 3

작가님이 말한 방송은 한 지역 방송국에서 곧 새로 시작하는 퀴즈 프로그램이었다. 당연히 ‘PD’ 역할을 제안하시는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작가’였다. 1시간 분량의 퀴즈 프로그램을 만들려면 다수의 작가가 필요한데 작가님과 합을 맞춰왔던 서브, 막내작가들은 대부분 본거지가 서울이었고, 장거리 출퇴근이 쉽지 않았다. 그러다 일을 그만둔 내가 떠올랐고,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물어볼 겸 겸사겸사 제안을 하신 거였다. 


아이템 제안, 자료조사, 취재, 출연자 섭외, 자막, 보도자료 작성 등. 방송작가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옆에서 지켜보고, 도와준 적도 있기에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그 역할을 해내는 것과는 다르다. 


'과연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예 작가를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프로그램 하는 동안만 도와드리는 셈 치고 한번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당시 하고 있던 아르바이트보다 월급이 많기도 했다. ‘방송은 내 길이 아니야’ 미련 없는 것처럼 돌아섰다가 정말 우연히, 갑자기 찾아온 기회에 바로 돌아선 것이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적응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국문학과를 나왔고, 짧지만 인턴 기자 경력이 있다. 글 쓰는 일이나 작가의 영역이 그리 낯설지 않다. 본격적으로 제작이 시작될 무렵에는 같은 외주 제작사에서 일했던 동료들도 합류해 팀 분위기도 좋았다. 하지만 그 퀴즈 프로그램은 최종 우승자 선발과 함께 끝날 운명이어서 나 또한 그 뒤를 생각해야 했다.


역시 힘들었던 순간도 나중이 되면 좋은 기억만 남는 걸까. 혼자 고독하게 취업 준비만 하다가, 옛 동료들과 같이 부대끼며 일을 하다 보니 모처럼 신이 났다. ‘맞아, 방송이 이런 재미가 있었지’ 싶은 순간들로 가득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다이어트 업계 취업에 계속 도전하자니 전공자들과 경쟁할 자신도 점점 없어졌다. 더 늦기 전에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면 ‘방송’만큼 쉬운 게 없었다.


남은 고민은 방송 제작 현장으로 돌아갔을 때 내 자리가 ‘PD’냐, ‘작가’냐 하는 것이었다. 한번 헤어진 커플은 다시 만난다 해도 같은 이유로 헤어질 확률이 높다. 내겐 ‘PD’가 그런 존재였다. 나랑은 어울리지 않는, 소화하기 벅찬 직업이라 생각해 그만뒀는데 지금이라고 달라졌을까. 오히려 경험해보니 ‘PD’보다는 ‘작가’라는 직업이 내겐 더 괜찮아 보였다. 어쨌든 프로그램의 총 책임은 PD에게 있고, 작가는 그 책임에서 한 발짝, 아니 반 발짝이라도 떨어져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작가의 책임감이 PD보다 덜하다는 뜻은 아니다. 보통 작가의 일은 내레이션 원고를 집필하는 것에서 끝나지만, 프로그램 한 편이 TV로 송출되기 직전까지 그 일을 붙잡고 있는 건 PD다. 적어도 내가 경험했을 땐, 마지막까지 영상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하는 일은 항상 PD의 몫이었다. 그러니 작가일 때보다는 일에 대한 부담감이 훨씬 컸다는 이야기다.


‘작가가 되면 내가 짊어질 무게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을까?’ 

‘무게를 덜어놓고 보면 방송도 힘든 것만은 아닐 거야’

‘PD보다 시간 여유가 많으니까 여러 가지 일도 병행할 수 있지’


많은 생각들이 밤마다 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고, 시간이 흐를수록 분명해졌다.


2015년 겨울. 예정대로 퀴즈 프로그램은 끝이 났고, 작가로서의 새 삶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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