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여담,> 본질에 관해.
당신은 본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오늘 하루를 보내오며, 또 여러 가지를 바삐 바라오며 생각했다. 본질은 무엇일까? 무엇이 대체 본질일까? 혹은 우리는 너무 많은 본질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이처럼 본질은 매우 추상적이고도, 범접하기 쉽지는 않은 그렇지만 깊이는 있는 그런 다양성이 공존하면서도 철학성 있는 주제라고도 생각된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는 것을 최근 들어 느낀 것이지만 좋아하는 것 같다. 말로 해도 좋다. 하지만, 글은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고, 어떤 순서와 논개 구조로 처리되며 나가고 있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알 수 있다.
그런 부분에서 여기서의 내가 추구하는 본질은 ‘글로 풀어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본질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인가? 당신만이 그럼 옳다는 것인가?
당연하게도 이 글을 읽는 자들이 알겠지만 그렇지 않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 요소로 정립되어 있는 요소라고 나는 생각된다.
그 말은, 즉슨 어느 다각도로 바라보더라도 똑같은 형태를 취하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다르다. 고로 각자가 생각하는 본질은 다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서로는 서로가 생각하는 본질의 정의를 이해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렇다. 이해한다면 이 세상에 다툼이나 충돌은 없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된다.
결국, 다 다르지만 그 끝을 가보면 본질이라는 정의는 모두 하나의 일축으로 부합하게 되지 않겠냐고. 따라서 나는, 이것이 본질이라는 정의에 부합하는 ‘본질’이라고 생각된다.
말이 장황한가? 그렇다. 두 번은 읽어야 얘가 지금 도대체 뭔 말을 하는 거야?라는 것이 이해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봐도 그렇다.
하지만, 그만큼 본질이라는 부분은 추구하기 어려운 요소이자, 복잡하고, 다다층의 다층 구조 같은 속성을 띄는 것 같다.
우리 삶도 그렇다. 나는 우리 삶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이 부분에 있어서는 공감을 얻으리라 생각된다.
우리 삶이 복잡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마 없을 테니까. 나는 조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당장 매일 아침 알람과의 사투, 식물은 물도 줘야 하고, 매 분 7시 30분에 출발하려다 34분에 출발하고, 점심에는 어제도 김치찌개인데 오늘은 샌드위치? 아냐 오늘은 조금 기분이 좋아야 해라고 말하며 아메리카노에서 레몬 에이드까지 밥을 먹고 후식으로 살 것을 생각하며, 친구가 보낸 카톡이 얘는 대체 뭘 말하는 거야 하면서 그것으로 기분 나빠 계속 신경 쓰여 지금 해야 할 일은 집중도 안 되는 둥 어후 당장 말만 해도 나열할 것이 너무나 산더미이다.
'이걸 어떻게 말로 다 하나?'
이렇게 우리 삶이 복잡하다는 것을 증명이랍시고 해보았다. 여기서의 삶은 복잡함이 본질일 수도 있다고 보며, 이런 각도로도 본질을 정의할 수 있다고 보인다.
하지만, 우리 삶이 복잡하다고 정의 내린다면 또 매우 슬플 것이다.
우리 삶은 행복하길 원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 글을 읽고, 흥미롭게 어떤 삽무더기 소리를 하는지 보는 당신도 행복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복잡함이 본질이라고 정의하는 동시 본질이라고 또 결코 내릴 수도 없다. 그래서 그 중간에 있는 것이 ‘본질’이다.
이걸 말하고 나니 양자역학이 생각난다. 0과 1이 동시에 있는 것. 쉽게 말해, 쥐가 치즈를 먹었다와 먹지 않았다의 경우의 수가 공존하는 것. 동시에 존재하는 수.
어쩌면, 그 본질은 우리가 내리는 시야와 시각에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써 내려가면서, 어떤 이는 책상에 앉아 현재 이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당장 앞에 있는 물컵에 물 밖에 없고 내 앞에 치킨이나 피자 같은 맛있는 음식은 없이 참고 물이나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불만을 가진 사람의 시야가 있을 수 있다. 그 사람에게는 현재 피자나 치킨 같은 맛있는 음식이 본질일 수 있다. 현재 그 시간 속 분/초에 있는 그에게는. 허나, 다른 한 편에 있는 글을 쓴다는 이는 현재 감사가 감사로 넘쳐 감사가 그에게는 삶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본질일 수 있다.
따라서, 각각 다른 본질을 정의 내리며 나아가게 된다.
...
…여덟 단어에서 박웅현 저자가 ‘본질’이라는 키워드 및 그의 다른 몇 개의 키워드도 읽어나가며 나도 내 삶에서 못 본 새로운 시야와 시각을 보게 되는 듯하기도 하다.
그는 책에서 밥 먹을 때 밥에 집중해야 밥 맛을 안다. 그래서 밥 먹으면서 다른 것을 동시에 보는 것을 내려놓고, 된장국을 먹었을 때 그 된장국의 맛이 이렇게 맛있었나 하는 그런 내용을 보았다.
그 부분은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 의미 있고, 인상깊이 점점 다가왔다. 그리고 내 삶에서도 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늘 본질이 있지 않을까? 본질이 중요하다는 생각에도 빠져 살았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면서 책은 읽지 않고, 게임이나 딴 청을 피웠지만 말이다.
시간이 지나 책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시기이다. 책을 통해 요새 많은 통찰과 삶의 지혜들을 들어나간다. 그런 것들은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나는 멍청하게도 고등학교 때 쭉 생각해 왔으면서 그때 읽었을 때랑, 지금 읽을 때랑은 왜 들어오고 흡수되는 격들이 다른 건지 나는 이해를 할 수가 없다.
아마 지금은, 리뷰나 하트 개수가 많은 책을 읽어서 그런 것인 걸까? 그렇다. 아마 그럴 것 같다. 나는 좀 통계학적으로 보려고 하는 기질이 있다. 뭘 보든 리뷰가 없으면 안 가고, 안 사 먹고, 안 산다. 리뷰가 있다는 건 나보다 많은 이들이 거쳐간 길이 터있기에 나도 안전히 갈 수 있다는 신호로 해석된다.
그러나, 이게 늘 맞는 것은 아니다. 오답이 걸릴 때도 종종씩 있더라. 당연하다. 사람이라 늘 맞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늘 70% 정도의 성공률은 가져가지 않았을까 싶다. 얘기를 하다 보니, 무슨 본질에 관해 얘기한다면서 갑자기 지 인생은 왜 얘기한담?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될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나조차도 뭘 얘기하려고 이런 연결을 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 얘기한 것들과 내 생각과 내 얘기의 시발점은 모두 박웅현의 여덟 단어 ‘본질’이라는 파트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사람을 볼 때 본질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인상 깊고, 매우 깊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됐으며, 다시 한번 흔들리는 풀 같은 내게 확신을 심어주었다.
그렇다.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바 이것들이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