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니또르쟈니 Aug 23. 2023

시간 내서 창밖의 비를 즐기시라

단풍잎이 보이다니

 봄의 가뭄과 여름의 긴 장마와 홍수를  겪은 사람으로서 지금의  억센 ☔ 를  즐기시라고 말하고 싶다.


 가족들의 출근은 제대로 돕지도 못하고 게으르게 일어나 어제 미룬 분리수거하고, 안개비가 아파트를 다소 어둑하게 드리웠을 때 우리 강아지 여름이를 데리고 산책을 다녀왔다. 물론 비가 오니까 우비를 입혀 데려간 건 베란다에 걸린 노란 우비를 보면 알 수 있다.


 본디 그런 편이 아닌데 아침부터 이러저러한 일로 바쁘다 보니 어느 사이 허리가 날씬해진 느낌이다.

엄청난 허기를 견디면서 단호박도 찌고 어쩌고 해서  아침을 먹었는데 후식으로 빵도  먹고났더니 이건 과도하게 혈당이 오르고 있는 느낌이 강하다.

☔ 를 좋아하기도 하고, 뭔지 답답도 하여 집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우산을 챙겨  밖으로 향했다. 1층 현관에서 활짝 펴지는 자동우산의 듬직한 느낌은 ☔ 와 움직일 내게 새로운 힘을 주었다.


 처음엔 몇 바퀴 평소에 돌던 방식대로 맥없이 돌았다. 돌던 중에  우산을 뒤흔드는 세찬 빗방울은 그것의 파편으로 내 팔의 살갗을 건드리기도 하고,

머리카락을 설풋 젖게 하기도 한다.  바람에  그리고 ☔ 에 떨어진 아직 여물지 않은 감은 아~ 이 정도의 계절이구나를 짐작케 하여 가을이 문턱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이번에는 지난번 산책 때 울타리너머로 본 보랏빛 맥문동을 보러 갈까 하고 옆동 산책로에

 들어서려니 공작단풍이 비에 젖어 다른 날보다 더 다소곳이 서 있다. ☔ 에 생글거리는 공작단풍을 지나  맥문동이 있는 곳에 다다러서 본 맥문동은 맑은 날 담너머로 보던 씩씩한 멋쟁이는 아니었다. 뭔지 비 맞은 생쥐꼴이랄까. 그래도 좋은 모습만 사진에 담아보기도 하고 ☔ 오는 날 아무도 찾지 않는 빈 의자를 보면서 덩그러니 홀로 있는 나와 처지가 닮았구나 싶기도 했다.


 산책로를 지나  다른 동의 잘 가꿔진 뒤뜰에 가봤더니 그곳엔 비비추가 한창이고 끔씩 나타나는 범부채나 그 밖에 이름은 모르지만, 깨꽃처럼 생긴 보랏빛꽃이 ☔ 에 젖었음에도 시원하고 아름답다.  그 사이 비는 잠시 쉬기도 하고 세차게 내리기도 하면서  나의 산책길을 재미나게 해 주었다.


 한 나무는 빨갛게, 끝이 그렇게 생겨 잘 보니까 단풍나무다. 이 ☔ 가 그치고  또 그리고 서너 번의 비의 때가 지나고 나면 조석으로 쌀쌀해져서 카디건을 챙기는 계절이 오겠지. 점점 단풍나무는 가을을 향해 더 강하고 매혹적인 물감으로 자신을 물들이겠지.


 우리 오늘 펑펑 쏟아지는 ☔ 를 귀찮아하지 말고  즐겨보아요. 발이 젖을까 봐, 빨래가 더디 마를까 ,

근심하지 말고 어떤 식으로든 즐겨보아요. 단풍이 붉게 물드는 날에 나는 비가 유난히 많이 내리던 여름을 멋지게 살아냈노라고 말할 수 있게 지금의 힘찬 ☔ 를 즐기시길.

비와 신우대
작가의 이전글 반바지 사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