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비픽커 실패 이유 회고
2022년 12월 23일 회사의 종무식 겸 한 달 전부터 예정해 뒀던 마니또 행사를 끝내고 나는 실패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회사의 자금은 남아있지 않았고, 두 달간 검토하던 투자 딜은 결국 무산되었다.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고 웃으며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지만, 웃을 수 없었다.
투자를 받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모델이었다. 그 당시 유행하던, 트래픽을 모아 그 트래픽을 기반으로 사용자를 모아보겠다는, 방식이었기에 투자가 끝나는 순간 우리의 사업도 끝났다. 그 추웠던 겨울날 1시간 거리를 걸어가면서 실패의 원인을 돌아보았다. 나 자신의 자괴감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남 탓 밖에 없었다. 처음엔 상황과 내 잘못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도대체 각국 정부는 무슨 생각으로 유동성을 그렇게 풀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다른 취미 산업 사업자들은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받고도 실패했는가. 그것밖에 못했는가. 왜 투자자들은 우리의 아이템의 가치보다 산업을 더 중시하는가....
하지만 생각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결국 모든 게 내 잘못임이 자명했다. 왜 나는 유동성 파티가 끝날 것을 생각하지 않았는가. 왜 나는 하나의 방법으로만 사업 모델을 고집했는가. 왜 나는 다른 취미 사업자들의 위기를 더 빨리 알아채지 못했는가. 왜 나는 더 철저하게 투자자들의 심리와 투자 결정 방식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는가.
내가 실패한 많은 이유들을 나열할 수 있었지만,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내가 실패한 이유에 대해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내 주관 없이 소비자들의 의견만 너무 반영해서'라는 이유가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깨달은 것은 '내가 충분히 많은 소비자를 만났다고 판단한 기준이 너무 낮아서 소비자를 조금만 만나고도 모든 소비자의 니즈를 알고 있다고 착각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는 것이다.
첫 번째 사업의 실패 이후 소비자에 더 집중하고자 했다. 첫 번째보다 훨씬 더 많은 소비자를 만났다. 열명 가량 1시간 정도 소요되는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리고 충분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난 뒤 다시는 소비자들을 만나거나 제대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서비스 업데이트를 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하비픽커에는 활성 사용자가 있다. 아직도 본인에게 추천된 취미 영상을 보고 따라 해서 플랫폼에 인증 게시글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다 8세~15세 어린 고객들이다. 그 당시에도 그런 경향을 볼 순 있었다. 그런데 인정하지 않았다. 그냥 2030만을 타겟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 같다. 2030보다 8~15세가 훨씬 더 열광하는 서비스였음에도 보지 못했다.
만약 우리가 그때, 8~15세 타겟을 알고 접근해 그들을 모아두는 특화 플랫폼이 되었다면, 그리고 그들의 부모까지 플랫폼에 락인시킬 수 있었다면, 우리만의 색깔을 가져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확실한 정보 없이 '취미를 통한 차세대 SNS'가 되기만을 바랐고, 그래서 2030에만 집착했다.
지금은 나와 우리 팀원이 고객을 하루에 최소 2명씩은 만나고 있다. 지금까지 만난 고객만 수백 명이다. 그리고 그 고객도 다니고 있는 회사의 규모에 따라, 직급에 따라, 비용 집행 권한 유무에 따라 다시 세분화시켜 인터뷰 데이터를 다양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정말로 신기하게도 그렇게 많은 시간 그리고 오래 테이블 리서치를 할 때는 절대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의 니즈와 그들이 쓰고 있는 서비스 그리고 그들의 생각 그리고 심지어는 새로운 사업 기회까지 그들의 입에서 듣고 서비스를 고도화시키는데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고객을 만나는 일을 멈출 생각이 없다. 앞으로도 타겟 고객군을 확장함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고객의 니즈를 포착하기 위해 수천 명, 수만 명의 고객을 만날 것이고, 그럴 수 있는 팀을 보완해 나갈 것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두 번의 실패 모두 나는 고객을 "충분히" 만나지 않아서 실패했고,
여기서 말하는 "충분히"는 "끝이 없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