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해서 정한 꿈
"너는 꿈이 뭐야?"
-드라마 만드는 사람
-카페 사장님
-작사가
예전에는 이런 식으로 구체적인 직업을 댔다. 다들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꿈이 없어서 고민이라고들 하던데 다행히 나는 그런 적이 없었다. 하고 싶은 게 변하기는 하지만 늘 있었다. 대신하고 싶은 게 있는데 못하니까 괴로웠다. 저 꿈들 중에서 성공한 건 드라마 만드는 사람뿐이다. 그래. 나는 꿈을 이룬 적 있었다! 그러나 3년을 못 채우고 때려치웠다. 그때만 해도 꿈을 이루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어서 얼마나 당혹스럽던지. 드라마를 만들면서 깨달은 건 '드라마는 -이다.'같은 게 아니었다. 꿈은 행복과 상관없다는 것. 그러니 꿈을 위해 너무 노력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성격이 좀 이상한 건지, 다들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노력하는 걸 좋아한다. 인정하긴 싫지만 어떤 게으른 이들보다는 노력하며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허세스러운 쾌감을 느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걸 남들에게 크게 티를 내지는 않는다는 거다. 어휴, 그랬다면 진짜 꼴불견이었을 텐데!
사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노력한다고는 하는데 성과가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다. 보여줄 게 없으니 입 다물 수밖에 없고 그러니 남들은 내가 무슨 노력을 하는지 알리도 없다. 내가 정말 열심히 했다는 걸, 가족을 비롯한 극 소수만 알고 있다. 쓰다 보니 조금 서글프다.
성과가 없었다는 건 곧 저 꿈들을 이루지 못했다는 걸 말한다. 어떤 과정들을 지나왔는지는 앞으로 얘기할 기회가 있을 텐데 결과적으로 그렇다. 현재 스코어는 완벽한 나의 K.O 패다.
어찌 되었든 지금의 나는 그냥 직장인이다. 이름 대면 알만한 곳도 아니고 무슨 일하는 지도 설명하려면 어려워서 그냥 '기획자'라고 소개하는 직장인. 이 작은 회사 안에서라도 인정받고 싶어하지만 그다지 별볼일 없는 1인으로 살고 있다. 완패당했음을 인정하고 한동안 꿈 없이 살았다. 꿈 없이 살면 큰일 나는 줄 알았는데 살아지더라. 그것도 아주 잘.
꿈을 위해 노력하지는 않아도 월급을 위해 노력한다. 또 그것을 위해 요령 피우지 않고 열심히 한다. 아침에 출근해서 나의 갑들을 위해 일하다 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 남편과 저녁을 먹으며 술 한잔 또는 동네를 산책하고 돌아와 인터넷 쇼핑 잠깐 하다 보면 하루는 금세 간다. 심지어 이전보다 훨씬 삶이 여유로워졌다. 해야 할 일만 하면 되니까. 해야 하는 일만 하기에도 벅찬 일상에 나는 꿈을 이루겠다며 발버둥을 쳐왔던 거다. 건강도 좋아졌다. 스트레스받을 일이 줄어드니까 이렇게 건강했나? 싶을 정도로 달고 살았던 위염 약도 안 먹은 지 조금 됐다.
한 가지 단점이 있었는데, 심심했다. 몇 년 동안 퇴근 후와 주말 시간을 내 꿈을 위해 할애했는데 그게 사라지니까 무료함이 몰려왔다. 드라마도 보고 운동도 하고 주말에는 좋아하는 맛집 투어, 카페 투어도 다니는데, 그러긴 하는데!
심심하다 정말로.
그래서 꿈을 새로 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전처럼 '일의 측면'에서 접근하지 않기로 했다. 딱히 하고 싶은 일도 없는데 꿈이 있어야 하니 억지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고 싶은 일은 없지만 되고 싶은 사람은 있었다.
근사한 어른
근사하다는 말을 좋아한다. 멋있다는 말은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지고 화려한 건 어울리지 않고. 나중에 정말 70대 이상이 되면 좀 우아하게 늙고 싶단 생각은 하지만... 지금은 좀 너무 먼 느낌이다. '근사하다'라는 말이 딱 좋다. 나에게 근사한 사람은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고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사람이다. 스스로에 자신감 있고 어딘가 쿨한 면모도 있는 사람. 외모를 떠나서 풍기는 분위기 자체가 어설프지 않고 단단한 그런 사람. 타인의 시선에 주눅 들지 않고 빳빳하게 고개 들고 웃어 보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그 전제는 '나'를 책임질 수 있는 어른이어야 한다. 근사한 어른이 된다면, 그래도 여기까지 해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럼 직업이 무엇이든, 어디에 살고 있든,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든 크게 상관없을 것 같다. 스스로 그렇게 느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근사한 어른이 되는 건 지금껏 해온 것보다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기도 또 어떻게 보면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이루지 못할 것도 같다. 죽기 전에 이룰 수는 있을까? 싶기도 하고(그럼 어쩌지) 어떤 방법을 들이대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꿈은 근사한 어른이다. 때때로 넘어지거나 때때로 찌질해지더라도 '이게 다 근사한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이야! 핫핫핫' 하고 넘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꿈이지 않을까.
>> 너무 얼토당토않은가 싶지만. 심심해서 정한 꿈이니까요!
일단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