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나서자마자 모바일 메신저를 지웠다
내 첫 직장에서의 생활은 마이피플을 빼고 논할 수 없다.
추억의 마이피플을 소환한다.
*마이피플(My People)은 (주)다음카카오가 제공했던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이다. 2010년 5월 처음 서비스를 시작하였으며, 2011년 2월 무료통화 기능 및 무료 영상을 추가하며 가입자가 400만 명을 돌파하였다. -중략- 다음카카오로 회사 합병 후 카카오톡과 마이피플 두 개의 모바일 메신저 서비스를 제공해오다, 카카오톡으로 집중하기 위해 2015년 06월 30일 서비스를 종료했다. 출처 : 위키백과
5년간 짧고 굵은 서비스를 제공하다 장렬히 전사한 '마이피플'의 리즈시절은 내 첫 직장 근무기간과 겹친다. 나는 카카오톡 유저였고 마이피플을 사용한 것은 오직 업무 때문이었는데, 당시 팀장이었던 Y가 마이피플을 사용을 지시했다.
내 주변에서 마이피플을 이용하는 사람은 Y와 나, 팀원 두 명뿐이었다. 나나 다른 팀원들이 먼저 메시지를 할 일은 거의 없었으니, 마이피플 알람이 뜨면 온리 그녀의 메시지라는 뜻이다. 게다가 핸드폰은 친절하게도 메시지가 오면, 전력을 다해 파란 불빛을 수없이 깜빡여댔다. 마치 그녀를 아는 듯이, 얼른 메시지를 읽고 답장해. 큰일 나기 전에! 라며 경고를 해대는 것 같았다.
Y의 마이피플질은 낮과 밤, 주말을 가리지 않았다.
*마이피플질 : 마이피플을 이용해 낮밤, 주말 가리지 않고 메시지를 날리는 행위. 사람의 퇴사 욕구를 무럭무럭 자라나게 만든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른 아침이나 밤늦게 메시지 하는 것을 실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에게 '보통'의 상식은 통하지 않았다. 그녀가 할 말이 생각났는데 내가 곁에 없다? 그럼 그대로 마이피플에 메시지를 날렸다. 그 시간에 내가 자고 있건, 씻고 있건, 데이트를 하건, 그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 뭐 상사가 메시지를 남길 수는 있다. 그건 그녀의 권한이라 치자. 그런데 그녀는 메시지에 대한 답장이 없는 걸 싫어했다. 확인하면 최대한 빨리 답장을 해야 했고 답장이 없으면 사달이 났다.
백번 양보해서 업무 확인에 대한 메시지라면 그나마 나았을 거다. '네.'라든가 '알겠습니다.' 같은 답장을 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으니까. (물론 이것도 짜증 난다.) 그런데 Y는 마이피플을 통해 업무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서 보내보라거나 본인 생각은 이러한데 어떠냐는 식의 의견을 물어왔다. 그렇다. 이것은 명백한 업무였다. 짧게 끝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곰곰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메신저 성격에 맞게 일목요연하게 짧은 메시지에 의견을 잘 담아내야 했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하는 사람들
'마이피플'
고맙다. 덕분에 언제 어디서나 함께 '일'했다! 개발자에겐 미안한 얘기지만(이걸 보진 않겠죠...?) 그때 Y다음으로 미웠던 사람이 당신이다.
그녀는 정말이지 시시때때로 마이피플질을 했다. 퇴근을 해서 남자 친구와 늦은 저녁을 먹다가도, 피곤에 쩔어 곤히 잠들었다가도, 주말에 데이트를 하다가도 휴대폰에 파란 불빛이 깜빡이면 가슴이 쿵쾅거렸다. 무엇을 하고 있었든 간에 답장부터 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그러니 휴대폰을 늘 주시하는 습관이 생겼고 혹시 내가 놓친 메시지가 있을까 봐, 알림이 오지도 않았는데 꺼져있는 휴대폰을 수시로 들여다봤다. 잠 역시 깊게 잘 수가 없었다. 언제 Y의 메시지가 내 폰으로 날아들지 모르니까.
그녀의 메시지에는 미안함이 없었다. 오히려 너는 자고 있니? 나는 이 시간에도 업무에 대한 생각을 하는데-라는 묘하게 기분 나쁨을 내뿜고 있었다. 그러니 자고 있어 메시지를 지금 확인했다고 핑계 대는 것도 어느샌가 불편해졌다. 나는 그렇게 파란 불빛의 노예가 되어갔다. 그게 뭐라고 도저히 자유로워질 수 없었다.
상황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Y는 서서히 질려가는 우리를 비웃듯, 단톡 방을 활용해 마이피플질에 더욱 열을 올렸다. 그날도 어김없이 주말이었다.
주말에 일이 없는 게 오랜만이었다. 나도 남자 친구와 데이트 중이었다. 물론 파란 불빛이 뜨나 안 뜨나 수시로 확인을 하면서 말이다.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확히 기억이 나는데, 낮 2시 정도였다. 주말 낮 2시. 얼마나 평화로운가! 무얼 하더라도 무얼 하지 않더라도 나른하게 휴식을 즐기는 게 어울리는 시간이다. 그러나 어김없이 파란 불빛은 반짝였고 그녀의 퀘스천이 날아옴으로써 그 평화는 깨졌다.
-애들아. A에피소드에 대한 아이디어 뭐 없니. 생각 좀 해서 남겨줘.
간략히 썼지만, Y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꽤 구체적인 아이디어를 요구했던 걸로 기억한다. 나도 빠르게 답장을 하지 못했으니까. 어쨌든 같이 있는 남자 친구에게 양해를 구하고 어떻게든 머리를 쥐어짜 냈다. 답장을 보내야 쉴 수 있다. 결국 그다지 좋은 아이디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찌어찌 답장은 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답장을 해야 하는 인원은 나를 포함해 3명.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나도 1명에게 답장이 없었다. 쿠궁. 나도 덩달아 초조해졌다. 왜지 왜 답장이 없지? Y는 성격도 평범한 편이 아니었다. 화가 나면 그걸 종종 성숙하지 못한 방식으로 표출했다. 부모한테 교육을 어떻게 받았냐는 등의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그딴 말로 모두가 상처 받지 않기를 바랐기에... 그녀의 화가 폭발하기 전에 답장이 왔으면 하고 진심으로 바랐다.
-K는 왜 답장이 없니?
제길. 기다리고 기다리던 팀원의 답장 대신 그녀가 먼저 답장을 했다. 사실 주말 오후에 떨어진 메시지에도 셋 중 둘이 빠르게 답했으면 됐다고 본다. 분명 업무시간이 아닌데, 왜 답장을 하지 않냐는 질문부터 잘못된 거다. 물론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문제지만. 두 시간 정도 됐을까 K에게 답장이 왔다.
-영화를 보고 있어서 지금 확인했어요. 죄송합니다.
영화를 보고 있었으면 답장을 못하는 게 당연하다 상식적으로. 영화관에서 핸드폰 화면 켜놓는 게 얼마나 똥매너인가. 사실 죄송할 것도 아니었는데, K는 사과를 했다. 그러나 Y는 이미 자신의 메시지에 답장을 두 시간 만에 했다는 것만으로도 분노로 가득 차 있는 상태였다.
-그래 주말에 영화 볼 수 있지. 근데 우리가 하는 일은 그러면 안돼. 24시간 일에 대해 생각해야 해. 그런 태도로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장문의 메시지였고 기분 나쁜 말로 가득 찼으므로 중략-
24시간, 일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이제 수수께끼가 풀렸다. Y가 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아침이나 밤이나 주말 가리지 않고 마이피플질을 해댔는지 말이다. 우리는 24시간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다. 그녀의 논리대로라면 자고 있어서 답장을 못한 걸로 욕먹지 않은 게 다행이다.
잠은 왜 자는가. 24시간 일 해야 하는데!
그 후로 최선을 다해서 잠자는 시간 빼고는 업무에 시달리며 지냈지만, 결국 나는 그녀가 원하는 24시간 일하는 사람이 될 수 없었다. (연재 중인 매거진'드라마 기획 PD잔혹사'를 참고해주세요.)
퇴사를 통보하고 마지막 출근날을 기다리면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남들처럼 늦잠이라던가 평일 카페 투어 따위가 아니었다. 마이피플을 삭제하는 것! 상상만으로도 행복해서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들어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평소엔 없었던 밝은 퇴근(퇴사) 인사를 하고, 남겨진 팀원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으며 회사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어 마이피플을 삭제했다. 10초도 걸리지 않는 일이었다. 이렇게 간단히 지워지는 어플 따위에, 그렇게 눈치를 보며 몇년을 전전긍긍했었구나. 행복함과 동시에 허무함이 밀려왔고 그다음으론 속이 시원했다. 그때 알았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는 게 이런 거구나. 이렇게 시원한 거였어! 나는 자유다!
다행히도 지금 회사에서는 24시간 업무를 강요하지도 않고 카톡을 통한 업무지시 또한 없다. 나의 상사들은, 거의 없는 경우이지만 혹여 주말이나 출근 전, 퇴근 후 연락을 하게 되면 먼저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한다. 나 또한 아래 직원들에게 그렇게 하고 있고... 나 편하자고 메신저로 시시때때로 연락하는 것이 받는 사람은 얼마나 큰 스트레스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당장은 바로 알려야 할 것 같고, 급한 일인 것 같지만 출근해서 전달해도 충분하더라. 회사 밖에서도 업무 생각뿐이라는 건 절대 자랑이 아니다. 퇴근 후 시간과 주말을 활용해 자신을 더 업그레이드시키는 게 오히려 후배들한테는 자극이 되더라. 내가 Y를 보고 단 한번도 멋있다.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는 것 처럼!
혹시나 이 글을 읽고 뜨끔한 당신, 당장 메신저질을 멈춰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