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개 Jul 23. 2019

낯선 이들과 친구가 되는 순간

혼자, 제주도 투어 이용기 (2)

https://brunch.co.kr/@rmk011/23


---------이전 글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투어 벤에 몸을 싣고 꼭 방문하고 싶었던 작은 서점 앞에 도착했다. 종달리에 위치한 소심한 책방. 유명세를 탄지는 몇 해 된 곳이다. 이곳이 주목을 받고 인기를 끌면서, 제주도에 작은 책방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종달리 '소심한 책방'

 최근에는 서울에도 작은 책방들이 하나 둘 생겨났지만 이전에는 대형 서점이 아니면 책 구경할만한 곳이 많지 않았다. 대형 서점은 책을 부담 없이 골라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가려진 보석 같은 책을 골라내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는 책, 대체로 좋아할 만한 책을 추천받게 되고 그만큼 실패할 확률은 낮지만 어쩐지 아쉬울 때가 있다. 쉽게 볼 수 없는 책을 만나고 싶은 그런 목마름이 있다고 할까?



내가 SNS를 통해 지켜본 소심한 책방은 그러한 갈증에 오아시스가 되어줄 곳처럼 보였다.  

소심한 책방은 주인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책방이다. 대형 서점 입구에 쪼르륵 줄 맞춰 서있는 베스트셀러들이 이곳엔 없다. 주인장이 고른 책들이 진열되어 있고 고른 이유에 대해, 아기자기한 글씨로 정성껏 적어두었다. 그녀와 취향이 맞다면 읽고 싶은 책이 한가득일 것이고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다양한 분야의 책이 비치되어 있어 찾아온 시간이 아깝지는 않을 것 같다.  취향의 문제를 떠나, 다양한 독립 서적들을 구경할 수 있다는 점은 확실히 이곳을 특별하게 만든다.


이곳에서 오랜만에 특별한 책 구경을 했다. 

특히, 주인장이 적어둔 코멘트를 읽는 것이 제법 재미있어서 그 위주로 책을 뒤적였다. 독립 서적이 많아서 그런지 확실히 표지 디자인이나 제목도 특이한 것들을 쉽게 만나볼 수 있었다. 그런 내 옆에서 책을 고르고 있던 투어 멤버 중  선생님과 제자 일행이 눈에 들어왔다. 


학생은 이제 고3이 된다고 했다. 아무래도 그 나이 때에는 교과서와 참고서를 가까이할 때이니까... 이곳의 책들이 더 낯설고 재미있겠지. 한 권이라도 놓칠세라 구경하는 모습이 내 눈에도 참 귀여웠는데 함께 온 선생님의 눈에는 오죽 예뻐 보였을까. 한 권 사 줄 테니 골라보라는 말소리가 들렸고 학생은 그 말에 더욱 신이 나서 어떤 책을 고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낯설지 않은 장면이었다. 나는 그 모습에서 내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우리 아버지는 검소한 분이셨다. 당신의 기준에서 돈을 조금이라도 허튼 곳에 쓰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제일 통하지 않는 말이 "내 친구 땡땡이도 부모님이 저거 사줬으니까 나도 사줘!"였다. 뭐 하나 사려면 그게 왜 필요한지에 대한 구구절절하면서도 정확한 설득이 뒤따라야 했는데, 그 과정이 필요 없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책'



그러니까 학창 시절 내가 유일하게 합법(?)적인 쇼핑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책이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서점에 가는 것이 너무 좋았고 구매할 책 한 권 한 권을 골라내는 과정이 즐거웠다. 책 한 권을 사면 한동안 품에 끼고 살아야 하니 내가 정말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사야 했다. 두 눈을 반짝이며 유심히 책을 고르는 저 학생을 보며 나의 오래전 모습이 떠올랐던 건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책방에서 나오면서 여행 에세이를 한 권 샀다. 처음 봤을 때부터 표지의 제목이 나를 끌어당겼다. 느긋한, 태평한이라는 뜻의 'LAID BACK' , 포르투갈 여행 에세이다. 나는 늘 느긋함을 갈망하지만 인간 자체가 그러기는 글러먹지 않았나 생각하는 편이다. 특히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을 때에는 그런 나에게 지쳤을 때였고...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만큼이라도 'LAID BACK'하고 싶었다. 






어쩐지 깊은 추억 속으로 헤엄치게 한 책방에서의 시간을 뒤로하고 우리 투어는 잠시 근처 카페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카페로 들어서며, 혼자 테이블을 잡고 앉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나는 그날 계를 탄게 분명하다! 투어 멤버들이 먼저 큰 테이블을 가리키며 다 같이 앉자고 제안해주었다. (진심으로 감사했다.) 그리하여 가이드까지 합세, 사이좋게 둘러앉아 티타임을 가졌다. 



오래 남을 것 같은 이 시간 


사는 곳도, 나이도, 직업도 다 다른 사람들이 모였는데 이야기가 물 흐르듯 흘러갔다. 처음엔 제주도에 사는 것에 대한 꽤 진지하고 현실적인 대화들이 오고 갔고, 뭐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게 결혼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바뀌었다. 


참고로 내가 회사에 휴가를 내면서 혼자 제주도 여행을 다녀오려고 한다 했을 때 들었던 반응이다. 

"남편은 어떡하고?"

"남편이 허락해줘?"

"남편 진짜 좋은 사람이다."

다 큰 성인인 내가 여행을 가는 것에 있어서 왜 남편의 허락이 필요한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부분 저렇게 이야기를 했다. 남편도 어린아이가 아니고 혼자 있는 것이 문제 될 것이 없는데 와이프가 없으면 굶어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댔다.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혼자 여행 가는 유부녀에게는 결국 저런 말이 뒤따라 붙는다. 이럴 땐, (물론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개인을 오로지 그 사람만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싱글 / 유부녀 / 애엄마 이런 식으로 분류해 가둬 놓는 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가 유부녀라는 거에 관심 없다. 그저 혼자 제주도를 찾은 여행자 아무개였다. 오랜만에 그런 틀에서 벗어나니 더 솔직한 생각들을 이야기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물론 나와 다 같은 생각인 건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회사에서 함께 지내는 사람들보다 다르다면 더 다른 사람들이니까 삶을 걷는 방향 자체, 아니 걸음걸이부터가 달랐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 시간이 더 즐거웠다. 다른 방식, 다른 생각에 대해 존중할 줄 아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부대낌 없이 이어졌다. 


그 카페에서 나는 만난 지 고작 몇 시간 되지 않은 낯선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다. 연락처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고 다음에 만나자는 약속도 없었지만 친구가 되었다. 이제 와서 수줍은 고백인데... 사실 나는 다음 장소로 이동하지 않고 이곳에서 그들과 계속 수다나 떨고 싶었다. 심지어 내가 제주도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이 기다리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이렇게 작은 책방에서 나의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고, 한적한 카페에선 수다의 즐거움을 선물해 주었다.






그동안 나는 여행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취향에 맞는 카페를 가는 것이 최고의 행복 중에 하나라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게 전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번 제주도 여행은 그곳에서 먹었던 음식과 커피는 크게 기억나지 않는다. 제주에는 아름다운 바다, 오름과 같이 자연이 주는 경이와 그 속에 녹아든 개성 있는  음식점이나 카페 등 볼거리가 참 많지만...


이번 여행에서만큼은 그날의 경험에 확실히 지고 말았다. 나에겐 이날 만났던 사람들, 그들과의 대화, 그들의 표정, 그때의 기분과 같은 것들이 더욱 선명하고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이렇게 글로 정리해보니, 더더욱 엄청난 확률로 여행지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들이 나를 품어준 것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혼자 조금은 외로웠던 여행에 하루 동안 친구가 되어준 그분들께 진심으로 고맙다. 

그분들은 내가 이런 글을 적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지만, (글을 읽고 오히려 섬뜩해할지도...?) 

어디서 무얼 하든 늘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제주에서 만난 낯선 이들과의 하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