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은 곧 퇴사로 가는 고속열차
승진을 했다. 어느덧 차장이 되었다. 어릴 때 차장이라고 하면 나이는 최소 40대 후반에 뭐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마법사 같은 사람을 생각했는데 내가 차장이 되다니. 몇 년 전, 처음 대리를 달았을 때만 해도 세상 사람들! 저 승진했어요! 동네방네 떠들고 싶고 아무나 못하는 큰일을 해낸 것 같았다. 승진자로 호명이 되었을 때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참을 수가 없어 힘들었는데 이번에는 그 반대였다. 쟤 왜 저래?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로 기쁜 척하느라고 눈은 그대로 입만 웃었다.
승진이 기쁘지 않냐고? 배부른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그렇다.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우리 회사는 호봉제로 돌아가는 곳이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나 그냥 기어 다니거나 자리만 채우고 앉아 있으면 올라가는 호봉제는 정말이지 일할 맛 안 나게 할 때가 많았다. 해를 거듭할수록 성취감이 들지 않아 이 문제로 대표님 이하 임원분들과도 여러 번 면담을 거쳤다. 달라질 거라고 했지만 결국 올해도 변한 건 없었다. 특히 작년엔 스스로도 많이 컸다 싶을 정도로 클라이언트와의 신뢰 관계나 결과가 좋았는데 딱히 그것과 상관없는 내 연차에 정해진 연봉에 싸인만 하면 됐다. 승진도 연차가 되어한 것일 뿐. 어차피 자리만 지켜도 했을 승진, 내 성격이 유별난지 몰라도 즐길 수가 없다.
게다가 우리 회사는 승진이 빠른 편이다. 대충 연차가 차면 위로 올려 버리기 바쁘다. 사원급 보다 간부급 직원이 더 많아서 얇은 다리로 비대한 몸통을 지탱하고 있는 격이다. 물론 우리 회사는 이 몸통으로 굴러가는 회사지만 그래도 너무 비대하단 말이지. 언제 무릎이 나가 고꾸라져도 이상하지가 않다. 그 몸통에 일조하고 있는 나 역시 가끔 이 힘없는 다리에 마냥 미안할 뿐이다. 한 걸음, 발을 뗄 때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쳐다보면 짠하다. 얼마나 힘드니 너네.
그러나 몸통에게도 고민은 있다. 몸통은 언제 머리가 될지 두렵다. 마치 퇴사로 가는 고속열차에 올라탄 것 같달까? 후진은 없다. 다른 목적지를 향해 환승하던지 그게 아니라면 직진뿐인 고속열차 말이다. 속도는 어찌나 빠른지 그냥 오래 타고 있으면 알아서 그 속도를 점점 높여 버린다. 뛰어내릴 수도 없고 그냥 타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덧 내려야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이 회사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몇몇의 머리들을 지켜봐 왔다. 이토록 작은 회사에 평생직장이란 개념은 애초에 있을 리 없고, 100세 시대를 살고 있지만 다들 40대 중반도 맞이하지 못하고 회사를 떠났다. 어릴 땐 그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머리의 시선이 부럽기만 했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안정이 보장되지 않은 채로 올려다볼 곳 없는 머리의 삶이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한 지. 그리고 이런 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기 어려운 참 외로운 자리였겠지.
결국, 꽃다발을 안겨주며 인사했던 그들의 마지막은 한없이 멋들어진 자발적 독립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비자발적인 그것이기도 했을 거다. 빠른 적응과 움직임의 요즘 것들은 연차만 차면 계속 올라오는데 올라갈 데가 없는 머리는 계속 그 자리에 있어야 하니 얼마나 안절부절, 엉덩이가 들썩들썩했을까? 그러고 보면 직장인은 정말 불쌍한 존재가 맞다. 발가락부터 버티고 버텨서 올라온 머리인데 여전히 눈치를 봐야 한다니. 그것도 위로는 하염없이 높은 하늘에 눌리고 아래로는 올라오겠다고 목울대를 자꾸만 건드려대니까 어지간히 설움이 복받친다. 그니까... 꼬우면 하늘 같은 사장이 되는 게 낫고. 결국 그렇게 위, 아래로 눈칫밥 실컷 먹다가 치사하고 더러워서 내가 하늘이 되겠노라 떠나는가 보다.
이러니 나는 되도록 오래오래 몸통이고 싶다. 늦어도 좋으니 짬밥 처리하듯 해치우는 승진 말고 진짜 내가 인정받았을 때, 한 단계씩 올라가면서 그렇게 몸통 해 먹으며 살고 싶단 말이다.
시즌이 시즌인지라 SNS에 한창 승진파티 사진들이 올라오더라. 특별한 날이라고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고기도 먹고 술도 마시고 좋아 보였다. 나는? 회사에서 함께 한 것 외에는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승진한 걸 아는 사람이 남편 말고 없으니까. 심지어 우리 엄마도 내가 승진한 걸 모른다. 내가 진짜 승진했구나! 하고 느낄 때, 그때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인데... 앞으로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