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개 Nov 02. 2020

월요일 오후 2시, 필라테스의 맛

소중한 연차를 기꺼이 바칠만했다 

올해 연차가 열흘이나 남았다. 늘 부족해 탈이었던 연차가 남을 수도 있는 거구나를 처음 알았다.  회사에서는 곧 연중 가장 바쁜 성수기가 찾아오니 그전에 연차를 소진하라고 공지를 내렸다. 돈으로 돌려주기 싫어하는 말이겠지만 무려 연차를 쓰라는 공지라니. 낯설었다. 이렇게 연차가 남아도는 것은 단순하게 어디 갈 데가 없어서. 1년에 한두 번씩은 꼬박꼬박 해외여행을 다녔기에 늘 연차는 모아두었다가 여행에 투자하는 편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연차를 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쉰다고 해서 갈 곳도 없고 특별히 할 일도 없기에.



어찌 됐든 연차를 쓰기는 해야 하니 월요일에 쉬기로 했다. 원래 아침잠이 많은 편이 아니라 늦잠도 못 자고 일어나 청소기를 돌렸다. 쉬는 날에 갈 데가 없다는 건 이런 거구나. 재미없다. 쉬는 날 청소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했다. 그날 나의 유일한 스케줄은 오후 2시에 잡힌 필라테스 수업 딱 하나.

아마도 필라테스 수업이 없었다면 옷장을 뒤집어 정리하고 있을 뻔했다. 여름옷 겨울옷이 뒤섞여 눈에 밟히는 정신 사나운 옷장을 뒤로하고 운동복을 입고 나왔다. 



홈트, 달리기, 헬스 등 했다가 말았다 하며 운동을 꾸준히 하기는 했으나 큰돈을 투자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삼 십대 중반이 넘어가고 몸이 달라지는 게 느껴지니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무너진 몸의 균형을 일으켜 세워야겠다 싶어 난생처음 거금을 써, 일대일 필라테스를 끊었다. 

그렇게 필라테스를 시작한 지 두어 달 되었지만 이렇게 훤한 낮에 센터를 가는 것이 처음인지라 어쩐지 감격스러웠다. 보통은 늘 퇴근 후에 동네로 와서 저녁 8시 수업을 들었다. 집에 다녀오기엔 시간이 애매해서 운동하는 날이면 출근할 때부터 운동복이 든 짐가방을 들고 출근해야 했다. 출근 복장과 어울리지도 않는 커다란 천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야 하는 것, 퇴근이 조금 늦어지면 수업에 지각할까 역에서 내리자마자 전력질주를 해야 하는 것, 샤워실이 없는 좁은 탈의실에서 클렌징 티슈로 화장을 지워야 하는 것까지… 나는 늘 운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피곤해지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가벼운 운동복 복장으로 솔솔 불어오는 바람과 눈이 찡그려 질만큼 밝은 햇살을 맞으며 걸어가고 있다니. 핸드백과 짐가방 없는 어깨가 어찌나 홀가분하던지. 오늘은 어떤 빡센 동작들도 척척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착각이었다.)

오후 2시의 필라테스 센터는 내 마음처럼 평화롭고 잔잔했다. 탈의실 안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어오는 인파도 없었고 그 사이에서 낑낑거리며 옷을 갈아입을 필요도 없었다. 절로 차분해지는 환경이었다. 틀어 놓지도 않은 클래식 음악이 내 귓가에 흐르는 듯했으니까. 

선생님, 저는 오늘 너무 행복해요. 제 코어 근육을 마음껏 쥐어짜 주세요. 

기꺼이 내 몸뚱이를 내어드리리.


@untitle87



평소에는 레슨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힐끗힐끗 시계를 보기 바빴는데 그날은 운동하고 있는 나에게 흠뻑 취해 50분을 5분처럼 보냈다. 아니, 평일 낮에 운동하는 것이 대체 뭐라고 이렇게나 엔돌핀이 솟구치는 건지. 신선한 경험이었다. 

어느덧 마무리 스트레칭을 하고 있을 때, 일대일 레슨 실 맞은 편의 단체 레슨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저들은 늘 이 시간에 나와 운동을 하는 걸까? 직장인은 아니겠지? 무슨 일을 할까? 그리고… 참 좋겠다. 나는 지금껏 알지 못했던 이 좋은 걸 이미 누리고 있었다니.

그렇게 운동을 하고 나와, 여전히 밝은 하늘을 보며 또 한 번 감격했고 근처 카페에서 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손에 들고 집에 가는 길은 어느 때보다 더 아름다웠다.



지금까지는 여행이나 특별한 사유 없이 쓰는 연차가 아까웠다. 이 아까운 연차를 써서 그냥저냥의 일상을 보낸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말고. 무조건 어딜 가야 하거나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데 써야만 했다. 그런데 나는 생경한 맛을 알아버렸다. 평일 오후 2시, 필라테스를 하면서 누리는 행복의 맛.   



다음 주 월요일, 연차에 대한 결재가 떨어지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스케줄을 잡기 위해 필라테스 쌤에게 연락하는 일이었다. 

월요일 낮에 하는 필라테스의 맛, 놓치지 않을 거예요. 



* 더 많은 일러스트를 보시려면 -> instagram: untitle87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