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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 Oct 19. 2020

조금은 나태해도 괜찮은 가을

가을탄다는 좋은 변명이 있기에

나 가을 타. 이 말을 이제껏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본인의 감정 기복을 계절 탓하는 것이 아닌가. 가을이 대체 무슨 죄길래. 하늘이 높고 단풍이 물들고 낙엽 떨어지는 것 말고 무슨 죄가 있단 말이야. 하긴 20대 때는 가을 탈 일이 없다. 그럴 새가 없으니까. 날이 선선해지고 바람이 솔솔 부니 놀러 다니기 얼마나 좋은지. 친구들과 테라스에 앉아 커피 한잔에 꺄르르 넘어가기 바빴고 남자 친구와 술 한잔 걸치면, 휘영청 밝은 달을 조명 삼아 뚜벅뚜벅 걸어 다녔다. 20대의 가을은 그렇게 낭만적인 계절이었다. 



그런 나도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어 가을을 정통으로 맞았다. 쉽게 우울해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어제는 작년에 다녀온 동유럽 여행 사진을 보다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흠칫했다. 사진 속 내가 너무 예뻐서, 남편과 나의 낯설을 만큼 행복한 표정에 눈물이 다 날것 같았다.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라 생각하니 금세 서글퍼져서 또 울컥.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는 것이 대표적인 증상이라 하던데. 의심의 여지없이 딱, 나는 가을을 타고 있었다.

illust by untitle87



주말엔 그저 늘어지게 늦잠을 잔다. 늘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근처 카페에서 즐기는 브런치가 루틴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영락없이 나무늘보의 현신이다. 잠에서 깼어도 일어나지 않는다. 불도 켜지 않고 계속 누워 있는다. 주말 늦잠의 미학을 이제야 배운다. 배가 고파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미적미적 일어난다. 무기력은 절정에 이르렀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무기력하게 삶을 낭비하는 느낌이 들어 죄책감이 들기도 한다. 정신 차리자! 뺨을 톡톡 치면서 자리를 툴툴 털고 일어나다가도 이러면 뭐 어때? 싶어서 다시 털썩 앉는다. 아예 소파에 드러눕는다. 그래 언제까지, 어디까지 할 수 있나 보자고. 

별 거 아니잖아. 그냥 가을 타는 건데 뭐. '가을 탄다'는 말이 이렇게나 좋은 변명거리다. 이렇게 게을러도 아무것도 안한다해도 누군가의 한심한 시선, 매서운 잔소리를 막아주는 부적같은 말이다. 왜 나한테 그래? 나 그냥 가을타는 것 뿐인데?



우리 잠시, 쌀쌀맞지만 따스한 볕이 눈부신 이 계절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자.

 

가을이니까. 

조금은 나태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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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좋은 이미지나 일러스트는 글이 주는 감정을 더 증폭시켜 주잖아요.

그걸 알지만 글의 내용과 분위기와 맞는 이미지를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더라구요. 저작권에서도 자유로운 이미지를 써야하다 보니 이 정도로 만족하자며 타협해야할 때 참 아쉬었습니다.


앞으로는 종종 결이 맞는 글에 untitle87님의 일러스트가 함께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참 설레고 멋진 일이에요:) 

더 재밌는 글 많이 써야겠어요. 친구 찬스는 참 좋은 것입니다...엄지척.


* 더 많은 일러스트를 보시려면 -> instagram: untitle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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