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고의 힐링은 모다? 모다?
상담을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문제와 문제가 될만한 것들은 항상 내 옆에 있었다. 다만 이 상황이 내 기분을 더럽게 만든 것인지? 아니면 내 기분이 더럽기 때문에 상황이 안 좋아진 것인지 분간할 수 없는 순간이 왔다. 그러다가 최근엔 그럭저럭 넘기기가 어려운 지경이 됐다. 뭘 할지 모르겠지만 뭐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간단하게 '전문가 센세'를 만나야겠다(한다)로 이어졌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은 누구에게나 문제가 되는 그런 것들이다. 나이 드는 것, 탈모, 취향, 적성, 게으름, 회피와 무책임, 한없이 범인인 나, 몸무게, 직업, 돈(없다), 자기계발, 박탈감, 자격지심, 피해의식, <도리화가>와 같은 거지 같은 영화가 존재한다는 것, 의심(혹시나와 역시나), 환경(미세먼지), 대인관계 등 별것이면서 별것 아닌 것들.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구구절절한데, 뿌리는 비슷한 것들. 답이 간단해 보이는데, 멀리 있는 것들.
이것들은 돌아가면서 커지고 작아진다. 살아있는 한 벗어날 수 없는 질문을 만든다. 인생에는 맞고 틀리는 것이 없다지만,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싶다. 그리고 그 결과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어서 선택의 순간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고, 끝없이 의심을 한다. 신중한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나는 점점 더 신중해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기본적으로 확신이 없을 때 '잘 될 거야'보다는 '으.. 시발 잘 안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먼저 하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면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매우 피로해진다. 그래서 이젠 신중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아무 생각이 없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됐다.
동네 보건소에서 스트레스를 측정해주는 검사를 받았다. 디나미카(DINAMIKA)라는 기계로 맥박? 측정하고, 우울증/스트레스/자살에 대한 설문지를 작성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정상보다 더 많이 우울하고, 교감신경이 예민해져 있고, 뇌 활성도(?)가 내 실제 나이보다 늙은 상태라고 했다.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고 있다는 뜻이라는데, 최근에 집중력이 바닥났다(+약간의 난독)는 점에서 납득했다. 다만, 딱히 납득이 안 되는 결과가 있었는데 내가 자살 위험군에 속한다는 결과였다. 아니 근데, 설문지에 솔직하게 체크 안 하고 자신의 생각과 반대로 '자살할 생각 없음'에 해당되는 답만 체크하면 그 사람은 자살ㅇ 위험군이 아닌가? 뭐야 이게?
사진은 선생님이 주신 정신건강 서비스 제공 병원 및 상담소 리스트. '어디가 잘 하는지 추천'해달라고 했는데 깔끔하게 거절당했다. 그리고 선생님의 강력한 추천으로 "청년마음건강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그림 색칠하고(...?) 학우들과 힘든 거 서로 털어놓기(...?) 같은 걸 한다는데 정말 가기 싫다...//
내가 받은 검사는 무료에다 간단한 스트레스 측정 검사여서 그런지 그다지 크게 인상적이진 않았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구구절절 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이 어느 순간 짜증 나기도 했다. 그래도 아예 수확이 없진 않았다. 얼마큼 정확한 검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오히려 '지극히 정상'으로 결과가 나왔다면 납득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이다. 선생님은 관리든 치료든 조치를 취하면 나아질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스트레스를 잘 풀어줄 취미가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취미가 있냐고 물어와서 나는 게임을 한다고 했다. 얼마나 하냐고 물어서 '요샌 이틀에 한두 번 정도 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7~8시간 정도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내내 살갑던 선생님이 단호하게 '그러면 안된다'고 했다. 게임이나 술은 중독성이 있어서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에 대해선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무엇이든 잘 질리는 성격이라(이는 내가 나에 대해 몇 안되게 아주 확신하는 것 중 하나) 충분히 게임을 조절할 수 있고, 내가 하는 게임은 12세 수준으로 지극히 비폭력적이다. 그리고 중독이 문제라면 술 담배보다 보리차 마시면서 게임하는 게 더 건강한 것이 아닌지, 아니 그보다 꾸준히 하는 것과 중독이 뭐 그리 큰 차이가 있는지, 컴퓨터 혹은 온라인이라는 수단이 문제라면 SNS나 유튜브도 안되고 그럼 전자책이나 뉴스, 지식 콘텐츠를 보는 것은 괜찮은 것인지 묻고 싶었는데, 다시 구구절절 말하는 것이 귀찮아서 그냥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상담을 다녀오고 나선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한 지인이 주말에 의정부에 있는 국립수목원에 갈 것이라고 하면서 같이 가겠냐고 물었고, 그러겠다고 했다. 힐링하면 자연, 자연하면 힐링이니께.
눈으로 봐도 하늘이 매우 맑은 날이었다. 더웠지만 간간히 바람이 불었다.
내가 사는 곳에서 의정부까지는 매우 멀어서 흡사 북한에 가는 느낌이었다. 우연찮게 점심 메뉴도 평양냉면이었다. 돼지육수의 향이 나는 육수였고, 수육에선 단맛이 난다고 지인이 말했는데 나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내겐 수육을 찍어먹는 소스가 더 달게 느껴졌다. 면은 얇고 꼬들했고, 가벼운 맛의 김치까지 마음에 들었다.
의정부역에서 국립수목원까지 가기 위해선 1시간 정도 버스를 타야 했다. 완전 휑한 시골길은 아니었지만, 버스는 오르락내리락하며 2차선 도로를 달렸다. 많은 산과 밭을 지나쳤다. 오고 가는 길에 잠시 할머니 생각을 했는데, 그때마다 조금 괴로웠다.
나는 우리집에서 국립수목원에 가는 방법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미리 알아본 것이 없었다. 다행히 이것이 염치없다는 것은 알고 있어서 지인의 하자는 대로 잘 따라갔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숲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물이 별로 없는 호숫가에 있는 카페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침엽수 사이를 걸었다. 숲이라 키가 큰 나무들이 대부분이었다.
걷다가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수목원을 한 바퀴 돌 땐 숲쪽을 먼저 걷는 것(입구 기준 시계방향)이 걷기에 더 낫다. 박물관 쪽 숲길 입구로 들어오면 오르막길이 한동안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국립수목원 입구에 있는 물품 보관함. 공짜였다. 굳ㅋ
뭐라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우울증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온갖 고사리가 있는 곳을 지나갔다. 이름표가 삼십 개 넘게 있었는데 다 고사리였다. 무슨 기준으로 구분했지? 왜 구분했지? 고사리를?
몇 시간 남짓 지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때론 하지 않으면서 걸었다. 무엇보다 더위를 참을만했던 것과 관계없이 내가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지인에게 미안했다.(드러워 보였을 듯)
이날 정말 많고 다른 녹색을 봤다. 빛과 서로 다른 잎들이 만나 만든 색이었다. 옅고 진함, 굵고 얆음, 양지와 음지, 공중과 수중에 따라 달리 보였다. 잎들의 입장은 잘 모르겠지만, 종이 다른 인간인 나는 그것들의 사정에 관계없이 엉키고 설켜 있는 것을 아주 잘 감상했다.
팻말에 있던 것처럼 정말 내가 나아졌을까? 모르겠다. 체념과 인정, 사실과 정신승리 사이에서 아직도 나는 괴롭다.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은 안? 못? 하고 있고, 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지도 못해서 문장을 지웠다가 고쳤다가 한다. 우리집 15층인데 벌레 우는 소리가 들린다. 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