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9월 14일에 대한 어떤 것

오늘 뭘 했는지 씀

싱겁고 평온한 생활이 이어지고 있다. 좋다는 뜻이다. 감정의 큰 기복 없이 잔잔하다. 물론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비가 하루 종일 내려서 기분이 좋았던 날도 있었고, 친구를 만나서 맛있는 것을 먹으며 선물까지 받기도 했고, 한 시간 반 동안 자전거를 타고 강남까지 갔던 날도 있었고, 무지하게 귀여운 고양이 굿즈를 사기도 했고, 오랫동안 기분 좋은 통화를 한 밤도 있었다. 


하늘이 예뻤던 날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다만 의식적으로 내가 뭘 했는지 기록하지는 않았다. 이사하면서 몇 년 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썼던 다이어리들을 잃어버린 이후로 어쩐지 일기를 쓰는 것에 대해 회의감이 들어버렸다. 그렇다고 다이어리에 썼던 폼대로 블로그에 쓰고 싶지도 않다. 다시 생각해보니 다이어리엔 고작 '빨래했음', '누구 만났음', '책 샀음' 정도의 메모 수준이고, 낙서나 끄적거리기 때문에 블로그에 쓰기도 힘들다. SNS에는 쓰기 더 싫고.


그렇지만 오늘처럼 밖에 있었던 시간이 굉장히 길어지면, 자연스럽게 '내가 그동안 뭘 했나'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지금 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지?


그래서 오늘의 일기를 적어보기로 했다. 마침 최근에 내겐 굉장히 무섭고 두려운 문제, 기억할만한 문제가 발생했다. 오른쪽 엄지발가락의 내성발톱 상태가 안 좋아졌다. 왼쪽 엄지발가락 나은지 얼마나 됐다고, 하하. 모든 신경이 오른쪽 발가락에 있는 것처럼 신경이 쓰이고, 신발을 신고 걸을 때 엄지발톱이 신발에 닿아서 눌릴 땐 정말 아프다. 


심지어 아까 낮에 돌부리에 걸렸는데 진짜 강남 한복판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내성발톱의 고통엔 내성이 없다. 조금 눈물이 났던 것 같다. 하지만 병원에 가기가 너무 두렵다. 마취주사는 아프다. 심지어 치료할 땐 두 방이나 맞아야 한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자고 일어나면 발가락이 나아있었으면 좋겠다. 


으으


오늘 강남에서 점심, 저녁 약속이 있었는데 사람 많은 강남에서 혹시나 밟힐까 땅만 보고 걸었다. 실제로 예전에 지하철에서 내성발톱 치료를 받은 상태였던 왼쪽 엄지발가락을 밟힌 적이 있는데, 그냥 생지옥이었다. 너무나 끔찍한 기억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밟히지 않았다. 


점심의 약속은 전 회사 동료와의 점심 약속이었다. 두 달 만에 회사에 갔는데 아무런 감흥이 전혀 없고 좋았다. 점심은 분짜라붐에서 새로 나온 메뉴인 분보남보를 먹었는데, 1만 2000원의 거금 치고는 맛도 양도 별로였다. 비빔국수라고 해서 수분이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자작하게 국물이 있었다. 면은 너무 풀어져서 수저로 떠먹어야 했다. 그나마 차돌박이는 고기라서 맛있었는데, 그뿐이었다. 


식사가 별로였던 것과는 별개로 전 회사 동료와의 대화는 상당히 즐거웠다. 회사의 상태는 놀랍게도 여전히 개판인 것 같았다. 비전도 수익모델도 없는데, 책임감까지 없어서 인간적인 신뢰까지 사라지게 만드는 어디에나 있는 흔한 개판이었다. 어쨌든 남의 개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즐거운 것이므로, 밥을 다 먹고 차를 마시는 와중에도 마구 웃었다. 하하 


점심 약속을 끝내고 저녁 약속 전까지 강남역 5번 출구 근처의 스타벅스에서 이력서를 썼다. 근 몇 년만에 쓰는 것이고+불과 얼마 전에 알아서 거의 즉흥적으로 썼다. 내용보다는 넘기는 것에 의의를 두자는 생각이었다. 결과는 전혀 기대하지 않지만, 수고했다는 생각은 들었다. 

똥이 성공적으로 최종제출 완료됐다. 


그리고 지인을 만나 치킨을 먹었다. 새우와 치킨이 같이 있었고, 먹기 전에 직원이 토치로 그 위에 불을 붙여 불쇼도 봤다. 뜨거웠다. 밥을 먹고 커피빈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낮에 이력서를 쓰면서 커피를 한 잔 마셨기에, '슈퍼 밸런스'라는 이름의 주스를 마셨다. 물 많이 먹어 밍밍한 포도를 간 맛이 나서 별로였다. 


카페에서 우리는 게임과 엑스박스, 돈(없음), 직장, 미래, 집, 부모(효도), 트럼프(욕), 자동차, 드라마, 소소한 삶의 자세, 글, 중국, 이직, 자격증, 텐센트, 주식, 허세, 항주, 개미와 슈퍼개미, 사랑과 듀오, 간장, 핸드폰 커버, 넷플릭스, 암살, 기업문화, 유튜버, 기계식 키보드, 한전과 자존심, 넓은 안목, 빗썸의 꺼진 전광판, 국비지원, 여행, 회의감, 무궁무진 등에 대해 깔깔깔 웃으며 이야기했다. 


지인은 소위 '쉴 때도 무엇인가를 하는' 유형의 사람이라 어쩐지 나는 내가 천하의 게으름뱅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인은 일을 하면서(바쁘게), 운동도 하고, 책도 일주일에 한 권을 읽고, 주말에도 업무와 자격증 공부를 하는 천하의 부지런뱅이다. 나는 나와 부지런뱅이가 갱장히 친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이 척척 잘 됐으면 한다. 


카페를 나설 땐 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굉장히 큰 우산을 가져갔으므로 신나 하며 우산을 폈다. 

오늘 찍은 사진은 아니지만


그리고 눈 앞에서 내가 타야 할 버스를 놓쳤다, 아오. 하지만 지인은 친절하게도 다음 버스를 함께 기다려 주었다. 함께 기다려 줄 때엔 닌자어쌔신과 주식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사실 나는 두 소재에 대해 다 몰라서 거의 듣기만 했다.   


딱히 친절하지 않은 기사가 운전하는 버스를 타고 50여 분 정도를 달려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 내렸다. 비는 그쳐 있었다. 어쩐지 조금 출출함을 느껴 편의점에 들러 꿀호떡을 샀다. 살 땐 다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두 개 정도 먹으니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아졌다. 


씻고 나와서 노트북을 켰다. 오랜만에 스피커를 켜고, 유튜브로 재팬 시티팝 스트리밍 채널을 틀었다. 웹서핑을 하고, 이 글을 쓰는 동안 띵곡 플라스틱 러브(Plastic Love)가 두 번 나왔고, 야마시타 타츠로의 메들리도 들었다. 그러고 나니 이 시간이 됐다. 소음이 걱정돼서 음악소리를 줄였더니 귀뚜라미 소리가 들린다. 간간히 차 소리도 들린다. 


작가의 이전글 엉킴에 관한 어떤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