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와 겨우 사이
내성발톱이 악화됐기에 걷는 것이 조금 더 불편해졌다. 엄지발가락이 땡기고, 발목도 약간 뻐근하다. 그래도 주사를 맞는 것은 너모나 무서우므로 조심조심 걷기로 했다.
할머니가 점심을 먹는 시간이 조금 지나서 도착했다. 이미 점심을 다 먹은 할머니는 자고 있었다. 요 며칠 할매는 잠을 무척 많이 잔다. 어쩌면 내가 항상 점심시간 즈음에 와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할매가 항상 아침 '일찍' 오라는 게 이것 때문이었나?
날짜를 보니 광주에 내려온 지 8일 째다. '어머나, 벌써?'인 시간이면서, '에게, 이제 겨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애초에 할매를 보러 오기 위해 내려왔다. 이 세상에서 할매를 볼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고(쓰면서 울고 싶어 졌다 정말로, 아무리 표현을 달리 하려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동안 다시 내가 보름의 시간을 내어 할매를 보러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렇게 할매와의 시간은 내게 전체적으로 '벌써'라는 느낌이 드는 시간이다. 하지만 막상 할매 옆에 있을 땐 가끔 '이제 겨우'라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가져온 책을 솔찬히 읽은 것 같아서 혹은 자다 깨어 눈을 끔뻑이는 할매를 보다가 시계를 봤을 때,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시간이 많이 흐르지 않았던 적이 있다. 할매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고 있을까?
숙소에 도착해서 TV를 켰다. 채널을 돌리다 우연히 SBS스페셜 '블루존의 비밀'을 보게 됐다. 블루존은 장수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장수하는지 이유를 찾아가는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론 자주 몸을 움직이면서도 여유로운 생활방식, 채식 위주의 식단, 삶이 목적의식과 원만한 가족관계 등이 그 비결이었다.
TV를 끄고 지금 내가 보는 할매의 삶을 생각했다. 30년 생인 할매는 장수하고 있지만, 단지 '오래 사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TV에선 부모가 나이가 들면 다른 지역에 살고 있던 자식이 부모 곁으로 오는 전통이 있다는 한 지역을 소개하는 와중에, 여기선 할매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 자식들은 한 명도 안 왔다.
그렇다고 우리 엄마를 포함한 외삼촌들, 이모들을 후레자식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로지 노모를 돌보기 위해 시골에 내려오려면, 집도 팔아야 하고, 직장도 옮겨야 한다. 돈도 있어야 할 텐데, 자신도 노후를 준비해야 하는 입장이라면 쉽게 모든 환경을 바꿀 수 있을까? 우리 엄마라면, 철딱서니 없는 자식인 나를 독립시켜야 한다. 그렇다고 할매를 집에 모셔오기도 애매하다. 당연히 도시에서라면 더 많은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려면 나가서 일을 해야 하고, 그동안 할머니는 간병인에게 맡겨질 것이고, 돈은 돈대로 걱정은 걱정대로 들 테다.
이 와중에 TV에선 블루존 중 하나로 양치기 마을을 소개했다. 건강한 노인들은 계속 목동 일을 한다. 또 다른 노인들은 늦게 일어나는 여유로운 생활과 하루 1~2잔의 와인을 마신다고도 했다. 사실 나는 이 대목에서부터 진짜 짜증이 났다. 지금의 할머니는 몸의 반을 움직일 수 없으니 그렇다고 쳐도, 할머니가 사지를 멀쩡히 쓸 수 있었을 때엔 저렇게 생활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나서 짜증이 났다. 여유란게 있었나, 할매한테?라는 의문이 들어 처음으로 그에 대해 생각하는데, 기억조차 나지 않아 나에게 화가 났다.
이어서 TV에서는 계속 장수하는 원인과 과학적 근거를 주절주절 말해줬는데, 아니 그니까 정말 장수 자체가 무슨 대수냐고? 경제적 안정으로 안정되고, 삶의 목적의식 있고, 의료 지원 충분히 되고, 가족과의 관계가 원만하면 오래 삽니다? 시발,,, 그걸 굳이 이탈리아까지 가서 확인하셨어요?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이랑 노인 자살률, 의료보험 정책이나 특집으로 잡아 주지. 차라리 장수하는 사람의 비결은 온전히 유전자에 있다고 했으면 그러려니 했겠다.
내가 이렇게 화가 나는 건 하루 21시간을 침대에서 보내는 할매가 떠올라서, 할매가 살아있음에도 누리지 못하는 것들과 살기 위해 해야 하는 모든 것들을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상태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일까? '노인이 되면 도리어 아기가 된다'는 말이 있다. 아기도 하루 21시간을 자고, 모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데, 아기에게 드는 마음과 노인에게 드는 마음이 같지는 않다. 아기는 커갈 테니까.
어쩐지 매일 할매를 볼 때마다 할매가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오래 동안 보지 않을 때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았는데, 매일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는 매우 슬퍼진다. 할매가 죽기 전에 내가 먼저 죽는다면 슬프지 않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