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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사람의 통화에 대한 어떤 것

<길 읽기 안내서>의 독후감은 아니지만 

나는 본래 문자보다 전화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백만 년 전쯤인 직장인 시절 전화공포증(무능공포증에서 비롯된 합병증이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전화하는 게 두려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행복이 그런 것처럼 고통스러운 시간 역시 지나갔다. 나는 여전히 문자보다 전화를 더 좋아한다.


다만 요즘은 좀처럼 누구와 통화할 일이 없고, 모르는 사람과의 통화는 더더욱 할 일이 없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얼마 전 그다지 친분이 없는 사람과 전화를 하게 됐다. 둘 다 심심했기 때문이었다. 대화 초반에 상대는 "낯을 좀 가리지만 말을 잘한다"라고 했고, 나는 "낯을 가리진 않지만 말을 잘 못한다"라고 말했다. 

영화 <레토> 中


결과부터 말하자면 '낯을 좀 가리는' 것도 나였고, '말을 잘 못하는' 것도 나였다. 대화 주제가 어렵진 않았다. 우리는 서로의 신변잡기에 대해 대중없이 이야기했다. 주로 질문을 하는 쪽은 나였는데, 상대방이 '자신에게 궁금한 것이 있느냐'라고 몇 번이나 물어봤기 때문이었다. 인간의 도리로 '없다'라고 할 수 없었고, 궁금한 것은 분위기를 망치지 않을 적당한 것이어야 했다. 나는 이것저것 물었다. 요즘의 삶은 어떤지, 영화를 좋아하는지, 일기를 쓰는지, 한국에 온 지는 얼마나 됐는지 등등. 


질문하는 동시에 나는 상대도 '내게 적당한 무엇인가를 되묻겠지'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질문은 거의 없었다. 나는 내게 관심 없는 상대에게 관심을 끌어야만 하는 역할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그 역할에 익숙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의 대화 속엔 짧지 않은 침묵이 자주 생겨났다.(애초에 서로의 취향이 달랐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가령 팀 경기를 좋아하는데, 상대는 혼자 하는 운동을 좋아한다던지 같은 것들)


내가 침묵 속에서 다음 화제를 생각하는 동안, 상대는 수화기 너머로 나를 관찰하느라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성격에 대해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심하고, 마음의 문을 여는 데까지 오래 걸린다고 말했으니까 맞을 것이다. 상대방의 매우 차분하며 성숙한 목소리, 아주 좋은 발음, 좀처럼 자신 있는 자기 평가, 상대방을 관찰하고 파악하는 모습(본 적은 없지만)과 화법, 태도를 보며 나는 어느새 이 사람이 '상당히 자의식 과잉인 사람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만, 직접 말하진 않았다. 하하, 당연한 거 아닌가?


그리고 대화가 마무리될 즈음, 진정으로 문득 궁금해졌다. 대화 속 간간히 자리 잡았던 침묵과 상대방에 대한 '솔직히 별로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나는 낯선 누군가와의 대화 자체로 즐거웠는데, 상대방은 어땟는지. 그래서 나는 물었고, 상대방은 꽤나 고민하고 조금 주저하다 '재미없었다'라고 말했다. 그 대답이 웃겨서 크게 웃었다. 


내가 재미없다니! 왕년에 개그맨을 꿈꿨던 나는 '재미없다'는 말을 들을 때면 추락하는 기분이다


덧붙여서 상대방은 자신이 왜 몇 번이나 내게 '자신에게 궁금한 것이 있는지' 물어본 이유를 말해줬다. 그 질문은 '넌 내게 관심이 없구나'와 같은 뜻이었는데, 대화하는 내가 '이 대화를 하기 위해' 말하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 말은 듣고 나는 반은 맞지만, 반은 틀리다고 생각했다. 나는 상대방과 대화하던 나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어버버어버버 그에 대해 설명했다. 상대방은 별 대꾸 없이 구구절절한 내 설명을 들었다.(지금 생각해보는 상대방은 철저하게 친절한 사람인가 싶고, 물어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다. 나는 '경계심이 높다'고 말하는 상대에게 마냥 솔직하기만 할 수 없는 사람이고, 그래서 '관심이 없어 보였다'고 말하는 상대방의 평가가 어쩐지 억울하다. 그리고 어쩐지 머쓱한 이유는 지금의 나는 정말로 좀처럼 타인에게 집중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억울한 것보다 머쓱한 감이 더 크다. 


내가 아주 조와라하는 작가인 레베카 솔닛이 <길 잃기 안내서>에서 '잃음'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비추어 보면, 나는 어쩌면(혹은 아마도, 혹은 부디) 길을 잃는 과정에 있을지도 모른다. 상실은 발견을 이끈다. 이전에 나를 이뤘던 몇몇의 특성들은 그저 과거의 소유물들처럼 느껴지고, 조금 다른 특성들이 어느새 퍼즐마냥 빈자리에 꼭 맞게 자리 잡았다. 그 퍼즐들은 본래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로, 혹은 쉽게 말하자면 운명처럼 언젠가 맞닥뜨릴 것들인 것만 같다.


상실을 대가로 한 발견이 성장일지는 모르겠다. 상실은 분명히 상처를 남긴다.  과거의 것들을 놓는 것은 음악 취향을 바꾸는 것만큼이나 쉽지 않았고, 난 이제 겨우 변화에 적응할 준비 정도만 마친 터였다. <길 잃기 안내서>는 길을 안내하진 않지만(길을 알려주면 '길 잃기' 안내서가 아니니까!), 때론 결심보다 반 발자국 빨리 걷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마지막 소감으로 상대방은 우리의 대화를 '쓸쓸한 대화'로 평했다. 혹은 내가 '쓸쓸한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는지도 모른다. 이 부분은 기억이 흐릿하다. 나는 솔직하지 못했지만, 상대방의 친절함엔 감명받았다. 그래서 전화를 끊기 전 상대방에게 나의 재미없음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쓸쓸하지 않은 나는 아주 재밌는 사람이라 자부하기에 아쉬웠다. 그래도 지금은 어쩔 수 없다. 겨울에 만난 이정표 같은 사람이었다. 글을 남기는 것으로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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