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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에 대한 어떤 것

<마음사전>을 읽고

내가 나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어떤 감정의 상태에 있는지 모를 때가 있다.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고,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이지 않으며, 평안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은, 어느 한적한 공원 한 곳에 있는 돌담이나 풀 한 포기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된다. 우울함과 외로움, 처절과 처연 같이 비슷해 보이는 감정의 수식어들 중 어떤 것이 내게 맞을까 정하는 것은 너무나 귀찮으므로 결국 '그냥 그런 기분'이라고 얼버무리게 된다.


이 상태는 활력이 다소 부족하기에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다 보면 거실에서 틀어 놓은 TV의 잡음이나 가끔 윗집에서 서툴게 치는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윗집의 피아니스트가 가장 자주 연주하는 곡은 영화 <기쿠지로의 여름> OST인 ‘Summer’나 ‘샹젤리제’인데, 아직 한 번도 끊김 없이 완주한 곡을 들어본 적은 없다.)


큰 감정의 동요가 없다는 것을 차분함이라고 한다면, 요 근래 지속되는 나의 차분함은 그 아래 있는 복잡한 감정들을 가리는 불투명한 얇은 막이다. 아래의 감정들은 튀어나오지도 저절로 가라앉지도 않고 차분에 닿아 있다. 차분의 짙은 남색 덕분에 가려진 것들이 정확히 무엇인지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나는 '봐도 모르겠네'라고 말하며 유유히 포기하게 된다.  


사실 내가 지금 어떤 기분인지 모른다는 것은, 어떤 기분인지 알기 싫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회피의 대가로, 무엇이든 해야 할 일은 될 수 있는 한 마지막 순간까지 미뤄버리기에 특출 난 재능이 있다.

 

나는 너저분의 대가이기도 하다


그래서 심리 상담을 받으며 "왜 그런 감정을 느꼈나요?"라는 질문을 받는 것이 너무나 귀찮았다. 나는 상담사 선생님에게 보통 한 주간 있었던 일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이야기했다. 어딜 가서 뭘 먹었는데 맛있었다/맛없었다, 누굴 만났는데 재밌었다/없었다, 누군가와 잘 지내고 싶다/누군가가 뭘 할 때 재수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등등.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으며 선생님은 끊임없이 위의 질문을 해댔다.

 

처음엔 이 질문이 꽤나 당황스러웠다. “공부는 해야 하는데 너무 귀찮아요”라고 말했을 때 내 기분은 귀찮은 것이므로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 질문이 익숙해질 때쯤엔 상담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무엇에 대해 말할지 생각하고, 그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까지 준비했다. 거짓말이든 진실이든.


<마음사전>을 읽으면서 그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나의 감정에 대해 생각하기를 기껏 미뤄놓은 와중인데, 의도찮게 그에 대해 생각하게 돼버린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책은 내게 묻지 않았고, 사전답게 활자를 늘어놓았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고, 문장을 이해하고, 김소연 시인의 풀이에 공감하거나 공감하지 않는 와중이었다.


내가 공감한 정도와 상관없이, 이 책의 풀이는 쉬우면서 탁월하다. 글이란 게 그렇지 않나. 쉽게 쓰기도, 탁월하게 쓰기도 어렵지 않나. 심심함과 무료함, 중요함과 소중함, 결핍과 허기, 솔직함과 정직함, 행복과 기쁨처럼 비슷해 보이지만 다른 감정들은 섬세하게 묘사되어 마치 잘 정리된 필기노트를 읽는 것 같다.(아니 시인이 줄글까지 잘 쓰면 대체 어쩌자는 건지, 원 참!)

소재에 대해 몇 장에 걸쳐 길게 쓴 이야기도,  시 처럼 읽히는 짧은 글도 모두 좋았다
책 맨 뒤에 부록처럼 붙어있는 한 줄 풀이


<마음사전> 덕분에 차분의 막을 살짝 들어 봤다. 대충이었는데,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언젠가 그 막을 완전히 걷고 그 안으로 풍덩 빠져들어 가야 할 날도 오겠지. 그때 다시 한번 이 책을 읽고 싶다.


<마음사전> 에 이성복 시인의 시가 있었다. 어쩐지 반가워서 좋아했던 그의 시들을 옮겨 적었다. 나는 본래 감성적인 딴짓하기의 대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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