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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없는 둔감에 대한 어떤 것

바꿔 말해 고통스런 예민에 대한 어떤  것

긴축재정 기간이므로 새 책을 사서 볼 순 없지만, 2주일에 한 번 서점엘 간다. 올해 초였나 중순이었나, 여튼 올해엔 전반적으로 크게 보면 힐링 부문에 속하는 책들(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모르겠다, 딱히 에세이라고 하기에도 뭐하고,,,),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라등가 등등이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론 내 취향이 아니라서 본 적은 없는데, 오늘 갔던 판교 교보문고에도 상당히 많이 보였다. 


여튼 여기저기 정병러(혹은 세미 정병러)들의 자기 고백들이 널려 있는데(상태도 나보다 심각한), 굳이 내가 이런 글을 쓸 필요가 있을까 하다가 이걸 '우울하다'는 기분에 크게 사로잡히지 않고 '고민'으로 볼 수 있을 거 같아서 글로 써보기로 했다. 

 

오늘까지 쓰기로 한 글이 있는데 쓰지 못한 것은 내가 단기적 만족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집에 가서 반드시 쓰겠다고 다짐해본다)t


시작은 본격적으로 정신 상태가 조금씩 나아지고 나서부터였다. 지난주로 고용센터에서 받았던 구직자 심리안정지원(이런 비슷한 이름)이 8주 채로 막을 내렸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동안 상담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다. 소감이라면, '생각보다 상담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번에 또 이런 상태가 오면 약으로 처방받는 것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선생님과 나는 나의 기분상태부터 신변잡기, 그 외 기타 나에 관한 것에 대해서 천천히 들여다보며 이야기하는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의 과정은 이전부터 나 혼자 혹은 지인들과 했던 것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3주 차 정도부터 상담 시간은 '내 말만 하는 수다 떠는 시간 정도'로 사용했고, 딱 그만큼의 효용을 얻었고, 만족했다. 


굳이 상담 이야기를 한 건, 날짜 감각이 많이 떨어져서 상담을 기준으로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그니까 우울감+무기력감이 가득했던 내 상태가 나아진 것은 정말 '어쩌다보니'였다. 어느 순간 활력이 돌아왔다. 실제로 기분도 좋아졌다. 상담이 5주 차에 접어들었을 즈음이었다. 


문제는 그전에는 우울+무기력하긴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예민해져 있었고, 계속해서 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단점이라면 그 생각들은 그다지 좋지 않은 것들이었고, 그 와중에 나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었지만, 그 생각들은 생생했다. 비록 나는 그 생각들에 사로잡혀 고통스러웠지만, 물에 빠졌을 때만큼 물이 잘 느껴질 때가 없으니, 과도하긴 했지만 그 안으로 파고들 순 있었다. 


그 상태가 좋았다는 것이 아니다. 몇 주, 혹은 몇 달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나는 매우 고통스러웠다. 우울증을 겪는 과정에서 몸을 돌보지 않아 건강 상태가 나빠졌다. 뇌가 점점 둔해진다는 느낌을 받았고, 눈 앞이 조금 흐릿해진 느낌과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들어찬 것만 같았다. 나는 뇌과학에 대해 무지하므로 우울증이 시력감퇴, 뇌 기능 저하에 영향을 얼마나 끼치는지 모른다. 다만 우울하고 무기력하면 저런 증상이 올 수밖에 없는 환경을 쉽게 만들어지고, 그곳에선 벗어날 의지라는 것이 자라나기 매우 매우 힘들어진다. 


그니까 우울증은 명백한 병이다. 우울증을 병이라 부를 때의 병은 간질, 천식, 암을 부를 때와 같은 병이다. 간질, 천식, 암 같은 병이 자연스럽게 생겼다고 해서 그것을 그냥 냅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우울증은 치료돼야 하는 것이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항상 서론이 길군...어쨋든 문제는 우울증이 상당히 호전되었는데, 이젠 그때와는 약간 반대로 내 생각이나 어떤 현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빠져들기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감정적으로 느껴야 할 것, 이성적으로 느껴야 할 것 종류에 상관없이 그렇다. 감흥이 없다고 해야 하나, 내가 보고 있는 것에 대해 한층 더 깊게 생각하는 게 안 된다. 이 정도로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자존감이나 자신감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자존감도, 자신감도 적당하다. 우울함도 정상 범주다. 답을 찾는 것도 생각해야 하는 것이므로, 알 수 없다. 가로등이나 밝은 간판 같은 것들을 멍하니 계속 바라보게 된다. 이유는 모르겠고, 그냥 보게 된다. 왜 보지? 왜 눈이 가지? 빛 때문에 눈이 시린데 왜 보는 걸까? 답을 할 수 없다. 그 질문에 오래도록 집중할 수 없다. 나는 땅 위에 있고 질문은 풍선처럼 하늘에 떠 있어 보이긴 하는데 손에 닿지 않는다. 하루에도 몇 개의 풍선이 날아가버린다. 


걱정이 된다. 가까운 시일이 아니라 시간이 꽤나 지나도 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할까 봐. '차라리 우울하게 예민할 때가 나았나'싶은 생각이 들까 봐서. 그래도 확실한 건 하나 있다. 정답이라서 확실한 건 아니고, 내가 가진 선택지는 '뭐라도 하는 수밖에 없다'밖에 없다는 것이다. 할 줄 아는 게 많이 없어서 할 수 있는 것도 많이 없다. 적어도 빨리 고를 수 있으니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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