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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에 대한 어떤 것(16/16)

강과 궤도 

집으로 돌아온 날, 스탠드 조명과 스피커 위엔 보름 동안 쌓인 먼지가 보였다. 물론 닦진 않았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캐리어는 돌아온 첫날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펼쳐진 채 방바닥에 있는데,  오히려 그 위에 짐이 더 쌓여가는 중이다. 


그리고 16/16를 쓰기 위해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집에 돌아온 당일 쓰지 못했던 이유 중 가장 큰 부분은 게으른 근성과 마음 때문이었고, 가장 작은 부분은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였다. 서너 번 정도 브런치에 로그인을 하긴 했지만, 결국 일주일이 지나서야 쓰게 됐다. 사실 이것도 어제저녁부터 쓰려고 창을 켜놨는데, 어랏? 열두시가 넘어버렸다. 


그래도 지금에나마 이걸 쓸 수 있는 이유는 내가 노래를 듣고 있기 때문이다. 심규선의 '강'이라는 노래를 반복 재생해서 듣고 있다. 노래의 멜로디도, 피아노 연주도, 심규선의 목소리도 좋아하는 만큼 가사도 좋아한다. 화자의 절망과 체념과 그리움의 표현은 어체과 심각할 정도로 잘 어우러졌다고 생각한다.  듣다 보면 다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나 김소월의 시 '초혼'이 떠오른다. 그리고 할매가 세상을 떠난 뒤, 이 노래를 듣는다면 할매가 생각날 것이다. 이미 생각하고 있으니 이런 말을 하는 것이지만.



광주에서 집으로 올라오던 날엔 기차를 타고 할매를 보러 갔다. 숙소는 버스역과 가까웠는데 기차역과는 멀었기에 그냥 먼저 기차역에 간 뒤 기차를 타고 함평으로 갔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오기로 했다. 


전날처럼 할매는 나를 잘 알아보지 못했다. 치매를 앓았던 적이 있던 할매라 그 때문인 줄 알았는데 며칠 전 엄마와 이야기할 때 엄마는 할매가 지금은 몸만 불편하고 치매는 아니라고 했다. 할매는 항상 아침 일찍 온다고 해 놓고 정오 즘이 돼서야 오는 내가 얄미워서 그랬을까? 아니면 너무 빨리 돌아가서 그랬을까? 그것도 아니면 엄만는 할매를 만난 지 (나보다) 오래되어서 잘 모르는 걸까? 


어쨌든 당시에는 할매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고, 이번 방문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이전까지의 날들과 특별히 다른 이야기가 오가진 않았다. 나는 할매 옆에서 책을 읽었고, 할매 몫으로 나온 간식을 대신 먹었고(할매는 간식을 아주 조금만 먹거나 아예 먹지 않아서 선생님들은 항상 내게 먹으라고 했다), 자거나 천장을 보는 할매를 가끔씩 바라봤다. 


다만, 정말로 갈 시간이 되어서 "할매, 나 이제 갈게"라고 말할 땐 감정이 울렁거렸다. 눈물이 고일 정도의 울렁거림은 아니었지만, 말로 표현하기 힘드므로 쓰지 않는다. 요양원에서 나와 한 시간에 한 대 있는 시골버스를 타고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를 많이 타보진 않았지만, 시골의 작은 기차역이나 사람이 없는 시간의 기차역 플랫폼에 서있으면 굉장히 동떨어진 느낌이 들곤 한다. 레일이 깔려 있긴 하지만 어쩐지 내가 탈 기차는 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다보면 항상 한 겨울밤 스페인인지 이탈리아인지 프랑스인지 여하튼 거기서 기차를 기다렸던 생각이 난다. 이건 '캬, 유럽까지 가서 그때 그랬지'라는 느낌으로 회상하는 추억이라기보다 그냥 빈 기차역 플랫폼에 서 있었고, 그때가 지나가고 기분의 카테고리 중 하나가 됐다. 좋은 기분, 나쁜 기분, 무서운 기분과도 다른 빈 기차역 플랫폼에 있는 느낌.


밤이었고, 아주 작은 기차역이었다. 함평역보다 작았다. 갈아타는 기차를 기다리려면 4~5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는데 기차역 밖엔 아무것도 없었다. 역 안에서 기다려도 됐지만, 노숙자 같은 사람이 두어 명 정도 앉아 있어서 무서웠다. 그래서 플랫폼으로 나와 앉아서 기다리기로 했다. 


추웠다. 처음 얼마간은 핸드폰을 가지고 사진도 찍고 놀았던 것 같은데 이내 배터리가 나갔다. 다이어리도 썼는데, 이탈리아에서 스페인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 여정이어서 내내 기차를 탔던 하루였기에 어느새 피곤해져서 그냥 의자에 멍하니 앉았다. 별도 보면서 하늘 구경을 하다가 기찻길도 보고 그랬다. 되게 빨리 지나가는 기차도 있었고, 서는 기차도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탈 기차가 진짜 오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왠지 오지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무서웠다. 그래도 별 다른 수가 없으니 일단 계속 기다렸다. 다행히 기차는 왔고, 무사히 탔다. 아주 늦은 시간에 탄 기차라서 내가 탄 칸에 나뿐이었다. 기차 안이 밝아서 밖의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는 불이 꺼졌는데, 그제서야 바깥이 조금 보였다. 저기 아무 멀리 언덕이 있는 곶에 도시가 있었는지 주황색과 흰색의 불빛들이 보였다. 굉장히 멋진 풍경이었고, 웃기는 소리지만 우주에서 달리는 느낌이 들었다. 무섭진 않았다. 


교정한 채로 신나하는 표정같다 ▣▽▣


여기까지 썼는데 비가 온다. 여전히 규선씨는 노래를 하고 있다. 강과 비가 함께 내리고 흐르는 밤이라니, 글을 미루지 말라는 계시다. 창문을 조금 열었다. 



집에 돌아와서 바로 스터디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할매가 내 일상에서 차지하는 시간은 아주 적어졌고, 가끔 할매의 움직이지 않는 오른손이 찍힌 사진을 본다. 그리고 잠시 할매를 생각한다. 


할매의 사진을 찍고 싶진 않았는데, 손목과 발목이 나오는 사진은 찍었다. 내가 가진 것 중에선 할매와 관련된 것이 하나도 없어서 찍었고, 혹시나 50년 뒤에 살아있을 내가 할매를 닮아서 내  할매가 누군지도 잊어버릴까 봐 찍었다.


노래에서 '떠나가든 돌아보지 말라고' 한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생각이 난다. 딱지가 져 까칠한 할매의 오른쪽 뺨, 말랑하면서 부드럽고 탄력 없는 손가락 마디, 아픈 표정으로 웃는 할매의 얼굴이나 팔딱대며 빠르게 뛰던 쇄골 위의 얇은 피부 같은 것들. 그것들은 합쳐져서 각각의 것들과는 또 다른 어떤 느낌을 만든다. 자꾸 돌아보니까 돌아보지 말라고 하는 것일 텐데, 돌아보지 않아도 느껴진다. 


강을 따라 흘러가고 흘려보낼 것들을 생각한다. 비가 오고, 흙이 쌓이고, 때론 탁한 오수가 흘러들어와 희석되고, 흐름을 흔드는 파동이 일고, 빛이 머무는 곳과 닿지 않는 곳이 있으며, 산 것과 살아있지 않은 것들이 뒤섞이는 중에 부유하고 침잔되는 것들을 떠올린다. 나는 어떻게 그것들을 맞이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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