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오래된 노래 가사 중에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라는 노래가 있었다. 여행을 할 때면 늘 떠오른다. 어쩌면 나의 노래일 수도 있겠다. 여행뿐 아니라 외출, 약속이 생길 때 가급적 하루에 몰아서 해치울 경우가 종종 있다. 외출을 거의 안 하는 편이라 한 번 움직일 때 동선이 맞게끔 정해버린다.
계획적인 사람은 분명 아닌데 이럴 때는 잠시 머리를 쓴다.
서울에서 출발해 아산에서 점심 먹고 대전으로 이동했다. 대전에서 20년 지기 10살 어린 동생의 집에서 2박을 했다. E랑 있으면 시간이 과하게 잘 간다. 그래서 점수를 매겨보면 10점 만점에 19점이다. 잠자리가 불편해서 1점을 뺐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내가 많이 나눠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름 그렇게 살아온 것 같았다. 이젠 내가 받는다. 마음과 생각과 머물 곳과 먹거리까지 다 내어주는 정말 언니 같은 동생이다.
E와는 20년이 다 되어 간다. 커피를 배울 때 만난 아이였다. 세상 때가 하나도 안 묻은 천진난만했던 그녀는 지금은 지혜롭게 살아가는 국화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나 4일 출발해서 저녁 늦게 들어갈 거야. 그리고 2박 할 거다"
이 한마디면 된다. 굳이 눈치 볼 필요가 없는 사이다. 나를 위해 주말 아르바이트도 취소했다고 한다. 이젠 꼰대처럼 구는 언니가 많이 이상했지만 또 받아준다. 그저 고맙기만 하다.
보답을 해야 하고 보답을 받아야만 하는 사이는 이미 넘어서지 않았을까? 집안에서 막내인 나는 동생이 없지만 동생이 있다면 이 녀석을 친동생이라고 말하고 싶은 아이다. 나중에 내 노후를 슬쩍 기대어 볼 수 있으려나 싶은 엉큼한 속내도 부인하지 않겠다.
점심을 늦게 먹어 배불러 죽겠다고 말하는 내게 소화제를 건넸다. 술 마시자는 말이 없길래 피곤하려나 싶어 나도 참았는데, 밤 9시 즈음이 되니 와인을 꺼내온다. 놀란 토끼눈을 한 내게 "소화 다 된 것 같아 이제 시작하려고~" 그럼 그렇지. 와인 안 마시고 넘어갈 수가 없지. 우리는 만나면 주종을 막론하고 1병은 마셔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 못 만난 시간은 아랑곳없이 밤새도록 이야기를 시작한다. 안주는 우리들의 못다 한 이야기들이니 얼마나 달고 쫄깃하겠니.
안주는 많이 달라졌다. 집안에서 일어나는 이해 안 되는 이야기들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각자의 개인의 생각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내면성장과 변화, 나의 변화와 정리과정을 조금씩 내어 놓았다. 그녀의 베풂을 받기만 하기에는 알량한 자존심이 앞서서 잘난 척도 제법 해버렸다.
"아직 난 언니야!"
대전에서의 이튿날 아침, 손수 만들어준 검은콩 두유와 그녀가 전하는 각종 신박한 살림 정보에 통장이 빌 것 같지만, 제법 살림 욕심도 생긴다. 집과 사무실, 강의장만 왔다 갔다 하며 겨우 끼니를 때우던 날들과는 이제 안녕해야 하지 않을까. 이번 여행은 사람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는 것도 포함되었으니 말이다.
“E야, 늘 고마워. 그리고 이젠 너에게 많이 배워야 할 것 같아. 근데 언니의 알량한 자존심은 아직도 내가 하나라도 더 주고 싶다는 거야. 그게 나야. 하핫.”
그날 밤에도 우리는 와인과 맥주로, 스팸칩이라는 새로운 안주로 2차전을 시작했다. 먹는 것에 진심인 우리는 ‘살찜’보다 ‘맛있다’에 중점을 둔다. 그래서 난 또 살이 찌는 소리를 느끼며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충주로 향했다. 소중한 친구들이 나와의 점심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내비게이션이 있으니 운전은 여유롭다.
‘마중’이라는 한정식 집에 도착했다. 오픈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우리는, 대관한 스튜디오라도 된 것처럼 사진 찍기에 몰입했다. 카메라 감독마냥 “각이 나오는 자리”가 몇 군데 보였다. 다만 나의 촬영 스킬은 마음만 감독이다. 친구들보다 조금 더 잘 찍는 정도, 그 정도뿐이다.
그래도 직업이 스마트폰과 AI 강사이다 보니,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만들면서 키득거렸다. 근사하게 차려진 한정식 상 위로, 나를 위해 주문해준 보리굴비가 내 앞에 놓였다. 그 순간 친구들의 마음에 목이 메었다.
나에겐 사람복도 있고 사람난도 있다. 그런데 이 친구들은, 박복하다고 느끼던 나를 박복하지 않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녀석들이다. 덕분에 이번 여행은 더 따뜻해졌다.
그녀들의 미소를 뒤로하고, 나는 문경행 주소를 입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