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로 돌아오니 언제 여행을 했는지 다시 아득하다. 분명 나는 낯선 도시에서 형언할 수 없는 감정과 행복했다는 기억을 안고 있는데, 기억만 남고 몸은 다시 현실에 바로 적응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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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즈음 카톡이 와 있었다. 선생님의 전화번호다. 혹시나 번호를 모르고 있을까 봐 친절한 그녀는 조심해서 오라는 메시지도 함께 남겼다.
운전을 해야 하니 톡보다는 전화가 좀 더 편하다. 이번에도 동가식 서가숙처럼 아침은 대전에서, 점심은 충주에서, 저녁은 문경에서 먹는 일정이었다. 동선이 맞아 운전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문경 근처에서부터 조금씩 길치의 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구글 타임라인을 확인하니 2시간 12분이 걸렸다. 글을 쓰는 지금 검색해 보니 59분 거리라고 나온다. 차이가 왜 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때의 도로 사정 때문이었거나 길을 잘못 들어 한 바퀴 빙돌아갔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대구에서 나고 자랐지만 문경이라는 지명은 이름만 익숙했다. 그곳에 가본 적은 없었다. 가장 많이 가본 곳이 서울이고, 가깝다는 부산조차 스물 네 살이 너머서야 처음 가봤다. 인근의 작은 소도시들은 늘 "언젠가 가보지 뭐"하고 넘기던 곳이었다. 한국에서 국내를 여행해 본 경험은 다섯 손가락을 꼽을 수 있다. 그런 내가 나 홀로 여행의 방문 도시 목록에 넣었던 것은 H선생님의 넉넉한 마음 덕분이다.
선생님의 집에는 담이 없었다. 작은 골목을 비집고 들어가면 바로 집이 나오고 마당에서 궁뎅이를 뒤로 돌려 후진하면 그게 주차의 끝이다. 기세 좋게 후진하고 내려보니 살짝 아슬아슬하게 세웠다. 50cm는 족히 넘어 보이는 낭떠러지 근처에 바싹 세운 느낌이다. 30년 경력의 드라이버라고 해도 시내용이고 줄을 그어둔 주차장 한정이라 운전실력은 여전히 미천하다.
내가 아는 선생님은 표정이 한결같다. 반가워도, 좋아도, 입 끝이 반달모양을 하고 눈도 반달이다. 눈 끝과 입 끝이 만나 악수할 것처럼 환하게 웃는다. 높지 않은 목소리톤은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한다. 목적지까지 찾느라 저녁거리를 사 오거나 어디서 저녁을 먹을지 생각도 못한 채 도착한 여행자에게 선선히 저녁밥을 내어 주신다.
직접 끓인 김치찌개와 수육, 밭에서 갓 따온 알배추와 직접 양념한 양념장이 테이블 한가득 놓였다. 염치없지만 젓가락 거들겠다는 나의 뻔뻔함에 주인장들은 '원래 밥은 같이 먹어야 맛있다'며 화답해 주셨다. 직접 담으신 하우스 와인도 한잔 내어준다. 김치 말고는 신맛은 잘 못 먹는 사람이라 조금 겁이 났다. 막상 마셔 보니 먹을 만했고 아니, 맛있는 와인이었다. 짧은 경험치로 짐작하건대, 디캔딩 하면 신맛이 부드러워질 것 같았다. 선생님의 잔으로 살짝 디캔딩을 해보고 한 모금 음미했다. 역시나 나는 신의 물방울을 조금은 먹을 줄 아는 사람이다.
저녁을 물리고 내게 내어준 원룸에서 선생님과 담소를 나눴다. 알지 못했던, 알 수 없었던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면에 쓸 수는 없지만 쉽게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들도 있었다. 나 역시 혼자의 여행이 필요했던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지난 3년, 그리고 올해의 일들이 비로소 정리되는 것 같았다. 정리라는 건 실체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작년 말부터 큰 정리를 시작했고, 올해 초에도 하나의 선택을 했다. 그리고 나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빨리 모든 것이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급한 마음과 달리, 그것들은 시간을 연료 삼아 조금씩만 움직였다. 그만큼의 시간을 태워야만 실마리가 하나씩 풀려나갔고, 정리의 단계를 밟아갔다.
그녀의 삶과 나의 삶 또한 시간이 아픔을 주고 답을 주고 어루만져 주었다. 한 시간이면 도착할 거리를 2시간에 돌아오듯 나도 이렇게 때로는 멀리 돌아가고 때로는 초고속 열차처럼 바로 가기도 했다. 밥도 푹 익고 뜸이 들어야 비로소 맛이 나듯 나의 인생도 지금은 뜸이 드는 도중이 아닐까
나는 지금, 익어 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