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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길게 걷고 짧게 생각하기 2

by Sonia

순례길을 막 끝냈을 무렵에는 뭐든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30여 일을 매일같이 걸어냈고, 체지방도 8%나 감소했다. 병원에서도 호르몬 수치가 많이 낮아져서, 매일 복용하던 약을 끊어볼 수도 있겠다는 말을 들었다. 뭐든 다 잘될 것 같던 그 에너지는 한 달 만에 사라졌다.


문제는 현실이었다. 현실의 문제는 결국 그 자리에서 하나씩 해결해야 하는데, 나는 마음이 바뀌면 문제도 따라 정리될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대면 업무가 비대면으로 바뀌어 가던 시기, 법인 설립부터 관련 서류를 준비하기까지의 과정을 겪으면서 나는 약간의 공황 상태를 겪었다. 마스크를 쓰고 답하는 공무원의 말을 알아듣기가 너무너무 힘들었다. 나이가 많아지면 이해력이 이렇게까지 떨어지는 걸까.


나보다 많이 어리게 들리는 목소리의 그들은 짧게만 답했다. 이해가 안되면 나는 진상 고객처럼 여러 번 전화를 해야 했다. 수십 번 시도해서 겨우 한 번 통화가 연결되면, 질문 하나를 하기에도 숨이 찼다.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설명을 보고 이해하라고 했다. 홍보지나 안내문에 적힌 문장은 내게는 추상화된 암호처럼 느껴졌다. 통화는 좀처럼 닿지 않았고, 설명은 쉽게 와 닿지 않았고, 이런 상황 자체가 나를 두렵게 했다.


모든 일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렇다고 그럴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떨어진 자신감을 어떻게든 다시 찾아야 했다. 나를 일으켜 세워보겠다고 새벽 기상을 다시 시작했다. 주식과 코인의 광풍이 휘몰아칠 때 나 역시 그 행렬 속에 있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사건이 여기저기에서 터졌다. 실제로 내가 알아보고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나의 선택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누구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몹시도 원인의 화살 방향을 밖으로 돌리고 싶었다.


상담을 시작했고, 약을 처방받았다. 그리고 이주일 내내 잠만 잤다. 주로 소파에 누워 넷플릭스를 보다가 까무룩 잠들기 일쑤였다. 잠을 자니 몸은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잠이 깨면 심장이 두근 거리듯 불안했다, 죄책감마저 가득했다. ‘나 이렇게 잠만 자도 되는 걸까? 다들 정말 열심히 사는데, 책 한 권이라도 더 읽고 자기 계발을 하는데, 나만 이렇게 잠만 자도 되는 걸까?’


이런 나에게, 옆지기는 스페인에 가고 싶으면 가라고 말했다.

“그럴 수가 없잖아. 일도 해야 하는데.”

“그냥 가. 내가 어떻게 해볼게. 넌 일단 가서 쉬어. 지금 필요한 건 휴식이야.”

주저하는 나를 위해, 옆지기는 바르셀로나행 비행기 표를 예매해 주었다.


“M, 나 스페인 갈 거야. 순례길은 못 걸어. 그냥 관광 여행을 할까 해.”

“나도 못 걷잖아. 알다시피 수술한 다리로는 무거운 가방을 멜 수도 없고, 길고 긴 길을 걸을 수도 없어.”

“네가 살고 있는 발렌시아에서 널 만나고, 스페인 남쪽 도시들도 여행해 보고 싶어. 위치를 알려줘. 근처 호텔을 예약할게.”

“그러지 말고, 우리 집에 빈 방이 있어. 그 방을 줄게. 우리 집에서 머물러도 좋아.”


여행이라고는 일본과 대만 정도였다. 스페인까지 혼자 떠나는 여행은 내게는 모험이었다. 도착 시간이 저녁 8시라 그날 밤을 위한 호텔을 찾아야 했고, 바르셀로나에서 발렌시아로 내려가는 기차를 예약하는 일도 내게 주어진 숙제였다. 매번 하던 일이 아니고, 영어와 스페인어로 된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한다는 것도 미로찾기에서 탈출구를 찾는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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