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서 바르셀로나 공항으로
3년 전 스페인 순례길을 걷기 위해 항공편을 알아보던 중 중국 동방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이 공동 운행하는 항공편으로 1회 상해 경유한 적이 있다. 경유 도중의 기억의 결과로 가급적 중국 경유는 하지 말자는 교훈을 크게 얻었다. 연착정도야 항상 있는 일이라 특별할 것도 없지만, 수화물 검사에서 대놓고 내 짐을 가져가는 행위를 겪은 후로는 신뢰감이 바닥이 되어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일이 종종 있다고 하더라.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정식으로 덤볐기에 나의 보조배터리는 지켰지만, 공안에게 잡히지 않은 것만 해도 천운을 가졌다고 하더라.
이번 여행은 메리와 비쎈떼와 함께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생활해 보기로 한다. 특별한 계획은 없다. 그저 한국 그리고 서울이라는 물리적 공간을 떠나서 스페인어로 제대로 대화할 수 없는 낯선 곳 발렌시아에서 메리와 비쎈떼의 집에서 한 달 머물 계획이다. 함께 인근을 여행할 생각이지만 구체적인 계획은 세워두지 않았다.
3년간의 강제 칩거 생활의 결과 나의 마음은 '어디든 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
3년 내내 스페인어 공부를 했지만, 오히려 어휘력은 퇴보한다.
원인을 찾아보니 영어를 제대로 못했던 이유와 같다. 독해력이 심각하게 부족하다. 그건 문법에 대한 이해도 아쉽고, 또 어휘가 많이 부족하다. 흠.. 생각보다 공부하기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바쁘면 손을 놓아버리기 일쑤였다. 이번 기회에 메리에게 특훈을 받아야겠다는 무모한 욕심을 가방 한가득 담아두었다.
서울에서 바르셀로나까지 대한항공 직항 편으로 예약했다. 2달 전에 항공편을 정했음에도 이미 항공료는 비쌀 대로 비쌌다. 고르고 고를수록 항공료는 비싸진다. AI로직의 장난임을 감안하기에도 수요가 많으니 점점 오르고 있는 중이라 눈물을 머금고 선택해야 했다. 대략 3개월 전에 예약한 듯하다.
시계는 여전히 오른쪽으로 돌고, 출발해야 하는 시간은 어김없이 왔다.
1 터미널이었으면 꽤 붐빌 것 같아 3시간 전 도착했다. 생각보다 많이 한산하다.
게다가 셀프로 수화물을 부칠 수 있는 기계가 대한항공 체크인 부스 왼쪽에 있다. 호기심 많은 나는 당연히 기계 앞에 선다.
수화물을 올려두면 저울의 숫자를 통해 내 가방의 무게를 알게 된다. 한 달간 나의 생활의 무게일 테다.
짐을 싸는 동안 수업이 넣을까 말까 했던 책 3권도 꽤 무게를 보태었다. 블로그 포스팅을 위해 접수와 사진 찍기를 함께 하다 보니 머뭇거리는 듯 보이나 보다. 직원이 와서 도운다.
대한항공 앱에서 48시간 전에 사전 체크인 알림이 메일로 왔다. 맨 앞줄에 자리가 보이긴 하지만 유아 동반석 옆자리여서 혹시나 해서 다른 곳을 정했는데, 공항에서 보니 그 자리가 비어있다. 빠른 속도로 좌석 배정 수정해 둔다. 유아동반 승객이 오면 바꿔줘야 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탑승전까지 없으니 괜찮겠지 라며~
이왕 앱으로 접속했으니 이것저것 둘러본다. 14시간 비행이니 식사는 2번 정도 나 올터이다. 메뉴를 살펴보니 첫 번째 식사는 제육쌈밥과 토마토 쇠고기스튜와 치킨 샐러드, 두 번째 식사는 김치볶음밥과 불고기 그리고 해산물 요리 란다.
저녁과 아침식사에 해당하니 제육쌈밥과 해산물 요리로 미리 찜해둔다.
수화물까지 보내고 나니 바로 탑승게이트로 이동하기 위해, 소지품 검사와 자동 여권 체크인까지 마치고 공항 깊숙한 곳까지 내처 들어가 버렸다. 정말 비행기 타러 가는 것 맞다.
탑승 게이트까지 이동하다 보면 흔히 보는 광경이 좌우로 면세점, 식당, 카페 등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대형 유리창 너머로 출발 준비 중인 비행기들이 보인다. 이때서야 실감이 나는 순간이다.
괜찮니? 어쩌려고? 할 수 있겠어?
여행을 처음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해외여행을 혼자 나가본 것은 20여 년 전 일본을 2번 정도 다녀온 것이 전부다. 그래도 일본어는 조금은 하는 터라 최소한 이동과 밥 먹기는 가능하다. 스페인어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읽는 것만 가능한 수준이고, 유럽이라는 생소한 지역으로 가는 것이라 내심 심장이 두근거린다.
'에이 인생 뭐 있냐? 하면 다 되겠지. 어차피 비행기는 환불 불가능한 상태다. 그리고 난 인천공항 출국장 어딘가에 있는 데 어쩔 거야~'라고 되뇐다. 시간도 남아 기내에서 읽으려던 책을 꺼내어 둔다.
언제나 여행을 하면 실수 투성이라 나만 여행을 제대로 못 다니는 걸까 생각했는데 아니더라. 계획대로 되는 여행은 없다 한다. SNS에 여행책에 소개되는 완벽한 이야기들은 그 여행의 일부일 뿐이란다. 나의 여행도 그러했다. 그래서 좋았던 기억보다 실수로 인해서 발생했던 기억이 더 강하게 남아있다.
드디어 비행기 문이 열린다. 늦게 줄 서려고 최대한 의자에 앉아 있다가 끝무렵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만석이다 보니 내 가방 넣을 곳이 없다. 이일을 어쩔꼬. 우쨌든 노력은 계속하고 있으니 결국 승무원이 와서 자리를 만들어서 넣어 준다. 노트북과 책이 있는 가방은 발 밑에 넣어둔다. 비행기가 커서 단신인 나는 가방을 넣었다 뺐다 하기에 여간 힘든 것이 아니라서 자주 쓸 것은 미리 빼어두는 것이 현명하다.
현지에서 빠른 시차적응을 하기 위해 최대한 잠을 적게 자려고 마음먹었다. 우선 스페인 영화 1편을 본다.
13살의 소녀가 함께 놀던 남자친구 아이를 갖게 된다. 작은 호기심이 엄마가 되게 한 것이다. 그녀의 엄마는 낙태를 권하지만 그냥 낳기로 한다. 남자친구에게는 말하지 말라고 한다. 10대의 미혼모 보호시설에 입소한 그녀는 다른 소녀들의 출산과정을 지켜보다 자신도 엄마가 된다. 이제 14살인 그녀는 놀고 싶다. 시내에서 춤추고 쇼핑하고 싶다. 하지만 현실은 아이에게 매여있다. 아이는 밤낮없이 울어재낀 다. 그녀의 엄마 역시 미혼모였다. "이 아이는 나를 불행하게 만들려는 것 같아요" 엄마 역시 미혼모였고, 남자친구가 있다. 소녀는 그 남자친구가 극도로 싫어서 밖에서 돌아다녔기에 그런 엄마를 미워했다. 하지만 그녀의 엄마는 말한다. "너를 포기하지 않았어"
영화의 마지막에는 다시 아이의 아빠인 소년을 만나고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자막으로 영화를 보아야 했고, 스페인영화를 처음 봐서 인지 전체 맥락이 다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와 다른 문화권의 생각과 삶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스페인어 공부하기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아 고생했다. 눈이 쓰리고 아프사오니 영화도 책도 더 볼 수 없는데 잠도 오지 않는다. 해외를 나가게 되면 종종 겪는다. 이렇게 잠을 못 자면 현지 적응은 잘하겠지~ 라며 위안해 본다.
예상 비행시간은 14시간 남짓이지만 시차가 바뀌니 저녁을 두 번 먹는 듯하다.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한 것은 오후 8시다.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입국장에서 내게 뭔가를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하지? 입으로 열심히 웅얼거린다. 호텔 발러 밖에는 생각이 안 난다. 에라 모르겠다 심정으로 그냥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좋은 걸까 서운한 걸까 그들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블로그에서 열심히 검색했던 공항 내부가 보인다. 내가 길은 못 찾아도 표지판은 볼 줄 아니 열심히 버스 승강장을 찾는다. 다행인 건 한국여행객이 꽤 보인다.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가는 여행객을 따라가니 공항버스 정류장이 있다. 대충 알겠는데,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매표기계에서 표를 구입하고 공항버스를 타고 에스파나 광장역까지 이동한다. 버스요금이 5.9유로로 가장 저렴하다. 택시 탈까도 생각했는데, 버스타도 아무 문제없다.
바르셀로나 공항의 표지판은 카탈루냐어가 기본이며 영어와 스페인어로 표기되어 있다. 아직도 나는 카탈루냐어를 사투리 정도로 인식하지만 확실히 다른 언어인 것인가 보다. 아직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에스파냐 정류장에 도착했다. 수없이 많은 관광객이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거나 나처럼 위치 검색을 하고 있다. 대략 밤 9시 정도이니 조금은 어둑해지려고 한다. 한국으로 치면 저녁 7시의 느낌이다. 호텔까지 도보로 500미터. 해외에서 구글맵을 켜고 거리뷰를 선택하면 거대한 화살표가 나와서 가야 할 방향을 보여준다. 정말 편리하다. 소매치기가 많다는 소문에 스마트폰은 투명한 스프링줄에 안전하게 잘 매달려 있다. 혹여 누가 채어가도 스프링줄에 걸려서 멈추리라.
산 넘고 물 건너듯 횡단보도 몇 개를 지나 좌회전 우회전을 반복하니 맞은편에 노란 불빛과 파란 간판이 보인다. 무채색 속에 돋보이는 컬러감이다. 안도의 숨을 내쉬고 들어선다. 들어서자마자 리셉션 부스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작은 책상이 있다. 중년의 남자분이 체크인을 하신다. 스페인어로 인사하고 체크인하겠다고 했더니 대뜸 어떤 언어로 말해 줄까?라고 한다. 그냥 영어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듣는 언어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 스페인어, 말하는 언어는 한국어> 일본어> 영어=스페인어 수준이라서 그게 그거다 싶지만, 조금이나마 편한 건 영어라서 어쩔 수 없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단어배열과 의미가 비슷해서 정말 포기한 영어를 스페인어와 함께 공부하고 있다.
방은 일단 실망이다. 극성수기에 예약했기에 5만 원짜리 방을 15만 원에 예약했다. 별 2개를 별 3개라고 적어두다니 이건 아니지 싶지만 어쩔 수 없다. 예약을 서둘지 않은 내 탓이다. 깨끗하지만 좁아도 너무 좁다. 거기 다난 방이 안 되는 호텔이라고 리뷰를 봤기에 두꺼운 담요를 꺼내어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자야겠다 싶다.
한국의 가족에게 도착 사실을 톡으로 보낸다.
그리고 눈을 감고 잠과 만나기 위해 양을 세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