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머신 타고 돌아간 어느 날
질문을 받았다.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돌아가 보라고 한다. 현재 나는 최면을 통해서 과거로 돌아가 보기 위해 리클라이너 소파에 비스듬히 눕는다. 눈앞에 작은 추가 좌우로 왔다 갔다 한다.
"이제 서서히 잠이 듭니다 레드썬"
"눈앞에 뭐가 보이나요? 지금은 언제쯤인가요? 몇 살로 돌아갔나요?"
최면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기에 TV프로그램에서 본 기억이 전부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때 그랬어야 했어. 그땐 왜 그랬을까? 라며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에 발도 동동 거리고, 애꿎은 허벅지만 디립다 꼬집은 날도 있다. 아침 운동으로 8km 정도 걸을 때도 헤드셋에서 들려오는 스페인어 강좌는 귀 근처에서 맴돌다 허공으로 날아가고 머릿속 후회만 가득하다. 그럼 어쩌라고, 이미 지나갔는데, 과거로 돌이킬 수 없는데 왜 과거의 끈을 놓지 못하는 건지 화가 난다.
책상 위에 앉아 구체적으로 적어본 적은 없지만, 후회하는 것 리스트와 좋았던 것 리스트를 적으라면 전자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질문을 받았다.
1.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언제였어?
-- 자존심이 무너지는 말을 들었을 때. 분명 내 잘못은 아니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 대한 책임감으로 총알받이 심정으로 회사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데, 상대가 비소를 머금으면서 "아하 그래요. 그럼 내가 손해 볼게요. 잘 사세요~"라고 말한다. 그 비소를 보았을 때 가슴속에 불덩어리가 솟아오른다. 결국 개인적으로 해결해 버렸다.
-- 빚을 다 갚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조금만 쉬어도 되겠지 했는데, 돌아보니 그때보다 10배가 넘는 빚이 거대한 쇠똥처럼 뭉쳐져서 나를 향해 굴러내려오고 있음을 발견했을 때.
그때보다 15번의 떡국을 먹어서 체력도 그만하지 않다. 앞이 보이지 않자 숨도 안 쉬어진다.
2. 그때를 통해 나는 무엇을 배웠어?
-- 일이던, 경제던, 사회적 위치던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 낮은 곳에 있으면 시야도 그만큼 낮다. 어린아이가 보는 범위가 작아서 생각의 범위도 그와 비례한다. 또한 롯데월드 전망대에서 아주 먼 곳까지도 볼 수 있으니 생각이 넓어지는 것은 당연하고, 능력도 의욕도 상대적으로 높고 커질 것 같다. 눈앞에 펼쳐진 세상만이 전부가 아님을 이제야 알게 된다.
3. 내 인생 중 가장 좋아하고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어?
-- 그가 내 곁에 있을 때. 6개월 정도 우연한 상황에서 가족과도 연락을 전혀 하지 않은 채 보낸 적이 있다. 형제 부모도, 나도 서로가 연락을 하지 않았다. 특별한 사유도 없었다. 문득 그 상황을 깨달았을 때 무척이나 당황했다. 내가 이렇게 존재감이 없었던 것일까? 먼지가 켜켜이 묻어나는 "나는 누구인가? "라는 철학적 명제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넣어두었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어디까지나 쌍방과실이니까~
언젠가 그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해~ 하고 싶은 거 해. 먹고 싶은 거 먹어. 갖고 싶은 거 둘 다 사." 선택장애로 고민하고 있으면 이렇게 말한다. 빈말인 것 같지만 참 듣기 좋다. 전적으로 내 편이 생겨서 행복했던 어느 날이 있었다.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무지개는 없다. 파스텔 색을 좋아한다. 그것도 엷은 파스텔 색으로. 나의 지나간 시간도 색을 입혀보자면 연한 노랑과 연두색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슬금슬금 다니기 시작한 여행 중 스페인의 하늘을 많이 봤다. 아니 그전에 프랑스 파리의 하늘을 먼저 봤지. 시리도록 푸르다는 말을 새삼 실감 나는 하늘이었다. 그때부터 짙은 파랑도 좋아하기 시작했다. 13킬로라는 거대한 등짐을 지고 하루에 20km씩 걷던 그날들도 내겐 몇 안 되는 행복한 날들이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의문과 누군가를 위해서 살지 않아도 되는 하루들이 가장 행복했던 날 들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질문받고 질문에 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