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와 비쎈떼의 초대로 숙소는 그들의 집 방한칸을 빌렸다. 아니 그냥 쓰게 되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나름의 설정은 2주일 정도 그곳에서 머물고, 스페인의 남부지방을 여행할 생각이었다. 집에는 한 달 내내 메리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러기에는 미안함이 많지 않은가.
메리가 나에게 일정을 묻기에 2주간은 너의 집에 있을 거라고 얘기했다. 혹 가고 싶은 곳이 있냐고 묻기에 발렌시아 주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어서 차츰 찾아봐야 할 것 같다고 말해두었다. 사실 어딘가로 떠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일단 한국이 아닌 곳에서 살아본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며칠은 그 도시를 둘러봐도 좋을 것 같았다.
사람들은 여행을 떠난다면 계획을 세운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에는 비용이 필요하다. 금전적이던, 시간적이던 둘 다이던 필요하다. 그래서 가성비라는 것을 따진다. 나의 여행도 처음에는 계획이라는 것에 많이 집중했다. 하지만 여행에서 그 계획 중 10%도 다 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리고 늘 후회가 앞섰다. 나에 대한 자책감이 늘어갔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계획 없는 여행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오늘 계획해서 내일 혹은 며칠 후 떠나는 여행이 좋다. 나의 경우 이렇게 여행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언어를 알거나 최소한 영어라도 잘해야 한다. 하지만 제대로 잘하는 언어는 없다. 그래서 계획을 세운다는 것이 내게는 어렵다. 애초에 패키지여행을 여러 번 해보고 자유 여행을 했다면 이런 혼란은 없을 텐데, 처음부터 자유여행을 했더니 틀에 짜인 패키지는 답답하다. 언어도 모르면서 그 나라의 여기저기를 여행하기 위한 일정을 짠다는 것은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미리 예습하는 정도로는 습득이 잘 안 되는 탓이다. 그 나라를 알아야 여행계획을 짤 수 있다. 이동거리며 필요한 교통수단을 찾아 계획표를 작성해야 하는데 이젠 그것도 점점 힘이 든다. 그래서 발길 닿는 대로의 여행을 원하기 시작했다.
일본을 자주 가는 편이니 일본여행을 예를 들면 처음에는 별 계획 없이 다녀오고, 마음에 들면 그곳을 한번 더 간다. 그러다 보면 점차 일본의 다른 곳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회화 위주의 일본어 공부를 한 탓에 일본어도 그럭저럭 밥 사 먹고 지하철 표 구입할 정도는 말할 수 있다. 지금은 일본의 도시 지명을 들으면 대략 어느 위치인지 알 수 있다. 구글링을 하던 블로그 후기를 찾든 간에 여행 준비를 하는 것이 한결 수월하다. 그러다 보면 점차 일본의 다른 곳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그 나라의 언어로 말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어디를 여행 가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이 정해진다.
스페인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는 여행은 순례길뿐이다. 그리고 그 길의 여행 역시 돌아와서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된다. 찍어온 영상을 보면서 블로그에 여행기를 쓰다 보니 그 길과 시간이 확 와닿고, 이해가 된다. 여행책에서 혹은 블로그에서 유튜브에서 여행기를 소개하는 분들의 글과 영상을 보면 부럽기만 하다. 계획적이고 잘 정리된 여행기 나도 쓰고 싶은데, 나처럼 무계획적인 사람은 시작부터가 어렵기 때문이다. 3년이 지난 후 일반 여행으로 스페인을 가겠다고 한 것은 남들 다 한다는 <OO에서 살아보기>라는 대유행에 나도 끼어보고 싶었던 마음과 메리와 비쎈떼가 그리운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소박한 이유에 맞추어 즉흥적인 여행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메리가 나름대로 몇 군데 생각해 둔 곳이 있는데, 그곳을 가볼까? 라며 묻길래 좋다고 말했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찾는다면 유명 관광지 밖에는 찾기 어렵다. 그리고 발렌시아에서 그곳까지의 거리와 차편 등 필요한 정보를 찾기에는 나의 스페인어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꼭 가고 싶은 곳은 알람브라 궁전이 있는 그라나다이다. 이곳을 정한 이유는 단순하다. 기타를 처음 배웠을 때 연주한 곳이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그 곡을 듣고 싶었다.
그래서 현지인인 메리가 정한 여행지로 가기로 했다. 우선 그동안은 집 주변의 마트, 공원 등 동네부터 탐험해 보기로 한다. 심각한 길치인 나는 구글맵을 사용하는 것부터 연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