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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킬번댁 Nov 21. 2020

남편의 역성을 들기 위해 태어난 부인.

주말 아침 세 식구가 오랜만에 함께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밥을 먹는 도중 아이가 남편에게 물었다.


"아빠! 그런데 아빠는 언제 담배 끊을 거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밑도 끝도 없는 아이의 질문에 당황한 남편이 아이와 내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지난 한 주 아이의 온라인 학습과 더불어 등교 학습의 공통된 주제가 '흡연에 관한 부분'이었어서 그랬는지 요즘 들어 아이의 모든 신경은 담배를 피우는 아빠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니 오랜만에 아빠와 마주한 식사 자리의 주제가 담배가 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아이가 받은 '흡연에 관한 수업'의 취지는 이랬다. 코로나 시대에 들어 높아진 흡연율이 자연스럽게 청소년 흡연율을 높이게 되었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어른들의 흡연뿐 아니라 청소년들의 흡연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자 국민건강 증진법에 의거해 이를 줄여보고자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흡연이 무조건 나쁘니 하지 말라 강요할 수만도 없었으니 다양한 영상과 자료를 아이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흡연의 폐해에 대한 경각심을 자연스럽게 심어주려는 목적이었다.


아이가 한 주에 걸쳐 받은 '학급 금연 수업' 은 참신했다. ebs에서 방송된 어린이 프로그램 중 흡연의 위험성에 대한 내용을 아이들의 수준에 맞춰 재미있게 각색한 동영상을 보여주기도 했고 우유갑 모양을 닮은 저금통을 조립해 만들고 각자 배운 수업 내용을 그려 넣음으로써 흡연의 위험성을 스스로 일깨우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흡연자가 코로나 19에 취약하다는 문구나, 흡연했을 시 일그러진 폐의 그림이 담긴' 저금통을 식구들이 자주 왕래하는 곳에 두고 항시 흡연에 따른 위험성과 부작용을 잊지 말고자 독려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의도를 알리 없던 남편이었으니 '아빠의 금연 사항'에 대한 자식의 물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수업 내용을 알차게 복습하며 아빠에게 설명과 책망을 동시에 해대는 딸의 말이 부담스러웠던 남편이 내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뻔했다. '지금 이 어린이가 하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분명 자신을 나무라는 소리인 건 분명히 알겠으니 부인 당신이 어서 나를 대변해 주시오!' 뭐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흡연 문제에 관해서는 나도 억울해 맺힌 게 많았으니 도와주고 싶지 않았다. 옳거니 잘됐다 싶어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의 당황한 표정을 읽은 아이가 옳다거니! 이 기회에 아빠의 흡연 세상을 무너뜨려야겠다 싶었던지 더욱 기세 좋게 남편을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아빠! 내가 아빠 담배 피우는 거 때문에 얼마나 걱정을 많이 하는 줄 알아? 우리 반 친구들 아빠는 다 담배 안 피운데. 담배 피우는 대신 과자를 먹거나 사탕을 먹는데 그래서 내 친구들은 아빠랑 손잡고 마트에 담배 대신 과자를 사러 간데. 나도 아빠랑 그랬으면 좋겠어. 애들이 너네 아빠는 담배 피우냐고 물어봤을 때 그렇다고 하니까 아직도 담배 피우는 사람이 있냐고 그랬단 말이야. 우리 담임 선생님도 담배가 피우고 싶을 때는 딸하고 놓아주면서 그런 생각을 없애 버린데. 그런데 아빠는 뭐야.... 몸에 해로운 담배를 계속 피우는 것도 모자라서 끊는다고 해 놓고 약속을 지키지도 않잖아."


또 한 번 남편의 간절한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역시나 도와줄 생각이 없다. 이렇게 해서라도 남편과 흡연과의 질긴 관계를 끊어 버리고 싶었다.


남편은 모계로부터 물려받은 만성 b형 간염 보균자다. 지난 년도부터 간이 활성화되어 간 수치가 올라 있었고, 지방간까지 생겨 누구보다 무엇보다 몸 관리를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놈의 스트레스가 뭐라고 그동안 잘 끊어왔던 담배를 스멀스멀 다시 피우며 건강 관리에 소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를 낳기 전, 앞으로 태어날 아이의 건강을 위해 스스로 금연하여 그 약속을 10년간 꾸준히 지켜온 남편이었다. 그런 남편이 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부터 직장 내 스트레스가 높다는 이유로 한 개비, 두 개비를 피우기 시작하더니 아이가 4학년이 되고 나서부터는 마치 작정한 사람처럼 몸과 옷에 냄새가 베일 정도로 담배를 피우고 는 게 아닌가.


남편이 느끼는 스트레스의 강도가 어떨지 나는 감히 추측도 못한다. 다만 남의돈 받아먹는 행위가 결코 쉽지 않음을, 마치 뼈를 깎는 고통과 비슷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기에 그를 이해하고 싶었다. 하지만 내 남편임을 떠나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던가. 아무리 스트레스가 치솟는다 하여 건강을 담보로 그에게 도박을 시킬 순 없는 것이었다.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가장 상처 받을 건 아이가 분명한데 너는 너, 나는 나. 하듯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흡연을 눈감아 줄 수는 없었다.


그의 아픔과 고통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말을 해도, 사정을 해도, 으름장을 놓아도 무슨 이유 때문인지 남편은 흡연을 제외한 다른 스트레스 해소 방안을 매력 있게 보지 않았다.

"알았어 끊을게" 란 성의 없는 말 한마디는 결국 지켜지지 않았고 거짓말이 되어 서로에게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고 말았다.


한참 동안 설교를 가장한 아이의 애원과 내 모른 척이 계속됐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생각이 든 건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있던 남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 아빠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어. 윤이 말 다 끝난 거지? 아빠 방으로 들어갈게."




자리를 피해 방으로 도망가 버린 남편을 등지고 식탁에 덩그러니 남아있던 아이의 얼굴이 실패한 계획에 대한 아쉬움과 상처 받은듯한 복잡한 표정으로 얼룩져 있었다.

누군들 안 그랬겠는가. 아빠를 걱정해 말했을 뿐인데 듣기 싫다는 듯 말 꼬리를 무섭게 잘라내고 자리를 벗어나 버렸으니. (어휴...)


아이는 혀를 끌끌 차며 " 이번에도 아빠는 금연을 못 할 것 같아."라고 담담히 말했지만 난 안다. 지금 아이는 많이 슬프고 또 속이 상할 것이었다.


"윤아! 아빠는 아빠의 인생이 있어. 지금까지 우리가 아빠의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으라고 말했지만 아빠는 듣지 않고 화만 내면서 귀찮아하잖아. 그 말 뜻은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없다는 거야. 안타깝지만 어쩌겠어. 당사자인 아빠가 싫다는데. 담배를 끊을 수 없다는데. 금연은 본인의 강한 의지가 있어야 하는 거야. 우리가 아무리 설득시켜봤자 아빠 스스로가 알지 못하면 방법이 없어. 그러니 윤이도 더 이상 아빠한테 담배 끊으라는 말 하지 말어. 아빠한테 맡겨둬."


"나도 알아. 하지만 담배는 건강에 안 좋은 거잖아. 그러다 아빠가 아프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난 아빠 아픈 거 싫어. 속상하단 말이야."


당장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하는 아이를 보고 있자니 침을 삼키기 힘들 만큼 목구멍이 욱신 거렸다.


'어휴... 이놈의 남편 탱구. 나 같으면 애 생각해서라도 단박에 끊겠구만. 스트레스 그까짓 거 뭐 대수라고 애한테 근심을 저리 주나. 꿈과 희망만 줘도 아까운 시간에. 어휴...'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버지 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가 났다.

화가 났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한 번 더 설득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아이를 재우고 남편에게 금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꺼냈다. 아이가 그런 말을 하게 된 이유에서부터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건강 생각해서, 아이 생각해서 다시 한번 끊어보길 간청했다.


묵묵부답으로 상황을 피해 가려는 남편이 참을 수 없다는 듯 큰 한 숨을 내 쉬더니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아니, 아무것도 뭘 몰라? 당신이 담배를 피울 수밖에 없는 이유? 아니면 끊을 수 없는 상황? "


" 어휴...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아 됐어.. 어휴.."


"아니, 말을 해야 알지. 내가 신도 아니고 당신이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그렇잖아. 그래도 명색이 내가 아빤데 애가 그렇게 말을 하면 당신이 내 편도 좀 들어주고, 내 입장에 대해 설명을 해줬어야지. 애가 말하는 거 가만 보고만 있어 그래? 그럼 내가 뭐가 되겠어? 이렇게 남편 체면을 구겨도 되는 거야? "


남편의 어린애보다 못한 발상에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어안이 벙벙했고 아니 남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좋은걸 하지 말라 말한 것도 아니고, 나쁜 걸 하지 말라 말한 건데 거기에 왜 이해가 필요하고 설명이 필요하단 말인가. 나의 몸이 아니라 너의 몸이 건강하지 않아질 터이니 나를 위함이 아닌 너 자신을 위함으로 금연해 달라 요구가 아닌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고 자식 앞에서 남편을 부끄럽게 만든 부인에게 탓을 넘기려는 남편의 말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


'잘못은 니가 했잖아! 그런데 왜 나를 이해심 부족하고 상황 파악 못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건데?'


이런 사람 많이 봤다. 직장 생활하면서 사회생활하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자신의 잘못을 철저히 합리화시키는 사람.

자신의 잘못 따위 돌아보려 하지 않고 자신의 실수마저도 상처로 위장해 부각하려는 사람.

구차한 변명과 이유를 둘러대며 확연히 드러나는 본인의 잘못 조차 인정하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변명으로 일관하는 사람.

너는 내 맘을 모른다며, 내 입장을 이해 못한다며 억울한 눈물을 흘리며 결국 모든 걸 남 탓으로 돌리는 사람.


그런 사람이 내 남편이었다니.


이젠 금연은 두 번째 문제인 것이다. 꾸준한 흡연을 통해 그 결과가 어찌 되든 말든, 그건 다음의 문제인 것이다.

현재의 문제는 아버지로서의 자질 문제와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휴.... 자식의 애절한 말 조차도 귀찮은 잔소리쯤으로 넘겨 버리거나, 자신이 풀어야 할 문제조차 부인에게 떠 넘기려는 남편의 자세를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고쳐야 하는 걸까?

아니지, 거기서 끝나면 양반인데 내 부끄러움을 감싸주지 않은 부인의 행동에 대해 원망하는 부분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아이가 자라 만나게 되는 세상엔 자신의 아픔을 남에게 전가해 탓하려는 그런 사람이 없길 바랬다. 그들이 주는 피곤함의 강도가 인생을 피폐하게 만든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들이었기에 아이만은 그런 못난이들 덜한 세상에서 상처 받지 않고 자라주길 바랬다.


그런데 웬걸... 복병이 나타났다. 그것도 한 솥밥 먹는 사이에서 말이다.


총체적 난관. 금연은 다음 문제다.


제일 피하고 싶었던 사람이 가장 가까운 곳이 존재하고 있다니. 이쯤 되면 세상이 글러 먹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운이 나쁜 것인지, 또 아니면 그런 사람은 절대 피할 수 없을 것이니 나 역시 그런 사람들이 되는게 되려 편한일인지...정말 모르겠다.


아... 남편에게 한 마디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이봐, 남편 씨. 내가 당신 역성 들어주고, 대변해주기 위해 태어난 줄 알아? 정신 차려 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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